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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ug 24. 2020

[나의 방] 퇴사 후 버킷리스트를 실천해본 적 있나요?

by. 진솔


죽기 전에 세우는 버킷리스트처럼 많은 회사원들은 퇴사 후 버킷리스트를 세운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내 방 벽지를 새로 바르는 것이었다. 베이직 색에 오돌토돌한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는 실크 벽지는 참 정이 안 갔다. 이사 온지 벌써 5년이 됐지만 한번도 이녀석을 건드릴 생각을 못했다. 회사를 다닐 땐 왜 그렇게 힘이 들고 번잡한 일을 하고 싶은지, 입사 후 늘 내 방 벽지를 새로 도배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중충한 방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와 미술관에서 사온 포스터들을 붙여도 봤지만 오히려 포스터의 분위기가 죽는 경지에 다달았다. 퇴사를 한 후에도 몇달을 미뤘다. 셀프 도배란 후회밖에 남지 않는 행위라는 여러 경험담들이 나를 지체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집>에 벽지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한번 벽지를 고르려고 마음을 먹으면 새벽까지 잠이 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엄마에게 은근 슬쩍 입을 뗐다. “엄마, 나 내 방 도배하고 싶은데 도와줄 거야?” 베베 몸을 꼬며 꼬득이는 나의 목소리에 엄마는 응답해주었다.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을 얻고 벽지를 시켰다. 색은 채도가 낮은 하늘색을 택했다. 파랑색을 좋아하는 취향을 듬뿍 담았다. 여러 경험담들은 틀리지 않았다. 셀프 도배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예전보다 세련된 시스템으로 풀이 아예 발라진 채 벽지가 배송됐다. 하지만 배송 후 바로 벽지를 바르지 못해 벽지끼리 달라붙은 사태가 벌어졌다. 짧은 신체조건은 천장까지 벽지를 쫘악 밀어내는데 자꾸 방해가 됐다. 코너와 벽지 사이사이는 왜이리 들 뜨는지, 손목이 아릴만큼 힘을 줘서 꾹꾹 눌러댔다. 역시 전문가가 있는 분야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모녀의 끈기와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정으로 꽤나 멋지게 벽지를 발라냈다. 모든 것이 같은 공간이 벽지 하나 달라졌다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자꾸 더 쓸고 싶고 자꾸 더 정리하고 싶었다. 누구의 손길과 숨결이 닿았을지 모르는 벽지를 떼어내고, 오로지 나의 취향이 담긴 벽지를 발라내니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나의 방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숨쉬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 애정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더 아끼겠다는 다짐같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노래를 들으며 더 나다운 나를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내 방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작은 버킷리스트 하나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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