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맛 수제 초코파이(2)
슬퍼지는 새벽, 웃기지도 않은 소설을 썼지(5)
그녀는 처음부터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문장 한 문장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음식을 꼭꼭 씹듯 등장인물의 이름을 눈으로 꾹꾹 눌렀다. 1페이지가 넘어갔다. 1페이지에는 개 이야기가 나왔는데 2페이지에는 누군가 해고당할 거라고 했다. 1페이지와 2페이지 사이에는 전혀 개연성이 없었다. 3페이지에는 해고될 줄 모르고 비싼 월세 집에 입주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뒤에는 시시한 바람 따위나 피우는 커플 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개를 떠맡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다음이 5페이지 끝에서 두 번째 행이었다.
『샌디! 베티와 앨릭스와 메리! 질! 그리고 그 망할 개, 수지!』
‘제기럴!!!’
진영은 또다시 실패했다. 겨우 너 댓 페이지를 읽는 동안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슬쩍 짜증이 났지만 영어를 못하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래, 영어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거야.’
진영은 맨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세 번째였다. 이번엔 펜과 노트를 준비했다. 등장인물을 노트에 써가며 읽기 위해서였다. 진영은 등장인물 이름을 꼼꼼히 적어 나갔다.
샌디-화자의 처제(5쪽 10행에 맨 처음 등장)
베티-화자의 아내(소설 두 번째 문장에 딱 한번 등장)
앨릭스-화자의 아이들 중 한 명(소설 5쪽 14행에 딱 한번 등장)
메리 –화자의 아이들 중 한 명(소설 5쪽 15행에 딱 한번 등장)
질-화자의 내연녀
수지-화자가 키우는 개(1쪽, 5쪽 두 번 등장)
여기까지 적고 보니, 수지가 사람이 아닌 개여서가 아니라 두 번 등장해서 기억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5페이지 마지막 행을 눈으로 훑었다.
『이것이 앨이 처한 상황이었다.』
다음 문장을 읽으려면 페이지를 한 장 넘겨야 했다. 그다음이 궁금하긴 했지만 낯선 이름이 또다시 등장할 것 같아서 진영은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우선은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을 파악하는 게 수준 높은 독자가 해야 할 일 같았다.
진영은 노트에 “앨-화자(소설 첫 문장에 등장)”이라고 썼다.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까지도 제목에 있는 제리, 몰리, 샘이 언급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책상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출출한 건지 목이 마른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냉장고 문이라도 열어 냉기를 몸에 쐬게 하고 싶은 건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진영이 냉장고 문을 쓰윽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투명 포장재에 낱개로 포장된 완주 수제 초코파이가 열 개 넘게 있었다. 조금 전에 배달된 초코파이였다. 6주간 간부교육을 받느라 장기출타를 했던 기관장이 교육 수료 기념으로 완주에서 사무실로 보내온 것이었다. 택배로 도착한 박스를 열자마자 직원들은 박스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박스 안에는 4가지 맛 수제 초코파이가 있었다. 20명쯤 되는 직원들이 나는 바나나 맛, 나는 블루베리 맛 하며 하나씩 들고 자기 자리로 갔다. 삼십 분 전 일이었다.
진영은 블루베리 맛을 골랐다. 초코가 녹은 줄도 모르고 포장재를 벗겨 한입 베어 먹다가 그녀의 손에 진득한 초코가 묻었다. 진영은 서랍에 있던 일회용 비닐을 꺼내 초코파이를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다른 직원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냉장고에는 이미 다른 직원의 것이 열몇 개 가량 있었다. 이십 분쯤 전이었다.
진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아무리 살펴도 자신이 넣어둔 바로 그 초코파이는 없었다.
‘망할!’
이것이 진영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자기 것이 아닌 게 확실한 블루베리 맛 초코파이를 먹기는 어쩐지 찜찜했다. 진영은 냉장고 문을 닫고 책상 위에 펼쳐진 카버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펼쳐진 곳의 마지막 행이 자신을 비웃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이 앨이 처한 상황이었다.』
진영은 책을 덮었다.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한입 베어 먹다 냉장고에 넣어둔 블루베리 맛 수제 초코파이를 누가 먹었을까가 너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