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으로 허기채우다 헛구역질하는 밤도 오겠지(2)
슬퍼지는 새벽, 웃기지도 않은 소설을 썼지(7)
우연은 지칠 줄 몰랐다. 늘 씩씩하고 당당했다. 내가 아는 부자들은 좀체 구김살이 없었으므로 부자로 자라서 그런가 보다 여겼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카프카 모임에 힘없이 나타났다.
-뭔 일이고?
-도장 찍으려고.
-뭔 도장?
건조한 표정으로 그녀의 남편이 비서와 오랜 연애 끝에 동거를 시작했다고 했다.
-누가 알았겠노. 내 인생이 선데이 서울이 될 줄을.
그녀의 말라비틀어진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슬퍼 보였다.
-그동안 생활비는 주드나?
내가 우연에게 물었다.
-......
-생활비도 안 주드나?
-제대로 된 수컷들이 있어야 말이지.
-어쩌면 감쪽같이 나를 속였노. 그것도 모르고 맨날 너한테 징징거렸네.
-속인 적은 없지.
그 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경주가 말했다.
-잘 생각했어. 이제 새로운 생이 열렸네. 내가 축하주 쏜다.
우리는 힘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주인도 없는 책방의 불을 끄고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그날 이후, 에너자이저 같던 그녀는 점점 시들해져 갔다. 더 이상 울지 않는 뻐꾸기시계 같았다. 우리의 모임도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는 사이 경주에게도,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비건 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그녀는 지인에게 카페를 맡겨두고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얼마 뒤, 각별하다던 지인은 카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치솟은 권리금과 보증금까지 다 챙겨 달아났다며 두어 달 만에 카프카 모임에 온 경주가 말했다.
-그거 말고 할 말 더 있제?
내가 말했다. 경주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우리를 향해 활짝 웃었다.
-나, 부산 떠날 거야.
-......
-꼭 떠날 필요는 없다이가.
-그렇지, 꼭 떠날 필요는 없지만 떠나고 싶어.
-먹먹하다.
내가 말했다.
-우리들 인생이란....
-왜들 그래? 난 나쁘지 않아.
-어디로 갈려고?
-제주.....
-제주에는 누가 있나?
-......
경주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실은, 나도 떠날 건데...
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연을 쳐다봤다.
-벌써부터 진주 사는 언니가 외롭다고 오라고 했다. 부산이 징그럽네.
우리의 마지막 카프카 모임은 송정 바닷가에서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모래사장에 서서 밤바다를 바라봤다.
-제주에서는 뭐할 건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그냥 떠내려가는 거지.
수평선 너머를 보려는 듯 경주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제주 가면 뭐 먹고 살 건데.
-굶기야 하겠어?
파도가 철썩했다.
-......
-우연아, 니는 내한테 쌀 계속 보내줘야 된대이.
-이 년아, 도둑질을 해서라도 보내 주께. 내가 약속은 지킨다.
우연이 나를 흘기며 말했다.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웃었다. 마지막 웃음이었다.
우리는 아까부터 바라보던 바다를 계속 바라봤다. 파도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음을 철썩 때렸다. 바람은 차가운데 얼굴이 뜨거워졌다. 우리 셋은 소금기가 밴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어루만지며 눈가를 닦아주었다.
-때론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다가 헛구역질 나오는 밤도 오겠지. 잘 곳이 없어 편의점에 앉아 있다가 쫓겨 나는 밤도 올 테고. 그래도, 어디서든 빛날 거야, 우리는.
바다가 뒤덮인 우리들 얼굴을 어루만지던 경주의 마지막 말이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