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골목을 8일 동안 걸었더니

by Jinsylvia


1월 말 어느 겨울 저녁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혼자 서 있었다.



소매치기로 명망 높은 도시라는데, 저녁에 도착해 큰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인적 드문 통로를 긴장하며 한참 걷다가 미리 예약해 둔 픽업 택시 기사를 만났다.

택시를 타고도 파리 시내로 향하는 40분 동안 긴장을 놓지 못했다.
장시간 비행이 몰고 온 피로로 깜박 잠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창문 너머 머리맡으로 에펠탑이 지나갔다.


아, 정말 파리다.




10대에도 그리 심하지 않았던 사춘기가
40대에 문뜩 와버렸다.

불안과 혼란의 20, 30 대를 지나
인생의 큰 숙제를 거의 마쳤다고 생각하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의 사춘기가 찾아왔다.


어쩌면
인생의 성공의 규칙 같은걸 성실히 따라온 나에게
생긴 작은 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루틴을 벗어나 이 혼란한 마음을 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비슷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퇴근 시간까지 정신없이 일하다가, 찬거리를 걱정하며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의 수많은 질문을 받고, 밥을 하고 빨래를 개고...

고요할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의 통 큰 허락과 잔고를 채운 1월 정근수당이
나를 파리로 보냈다.




그림을 그리며 막연히 꿈꾸던 도시.
낭만과 예술의 도시.

인생의 반을 살고 나서야 그곳에 도착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하염없이 걸었다.

하루에 여섯 시간은 기본이었고 어떤 날은 그보다 더 오래 걸었다.

구글앱도 자주 보지 않았다.
골목이 나오면 들어갔고 사람이 적은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파리는 생각보다 조용한 도시였다.

관광객이 많은 거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낯선 창문과 오래된 문들,
이름 모를 작은 가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를 계속 걸었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오르세 미술관

한 번은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빛과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연필을 움직였다.

그림을 조금 그리다가 그대로 벤치에 누워 잠들었다.

잠에서 깨 르누아르의 커다란 그림 앞 긴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식사는 하루 두 번

민박집에서 아침을 가득 먹고 늦은 점심이나 저녁쯤에 간단히 먹었다.

어느 날은 동네 시장에서 산 딸기와 블루베리에 오 쇼콜라 빵 하나를 손에 들고

주택가 공원 벤치에 앉아 천천히 먹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일부로 애써 정리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는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듣고자 애쓰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파리의 골목을 걸으며 느껴진 내 안의 아주 작은 목소리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껴졌다.


여기는 아니다.


나는
이제 진짜 다음 챕터를 넘겨도 할까?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