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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Aug 02. 2021

남편의 주재원 발령 (feat. 독박 육아)


‘베트남… 베트남이라…

쌀국수, 월남전, 박항서 감독… … ’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습니다.


몇 달 전, 둘째가 돌이 지나고 누워서 재울 수 있게 될 무렵... 남편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언어 프로그램’을 신청했습니다. 주일에 이틀, 금요일, 토요일에 하루 종일 강남에 있는 한 어학원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육아에 정신없었던 저는 토요일에 혼자 육아를 하는 게 내심 별로였지만 몇 달만 고생하자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외국어 중에서 ‘베트남어’를 선택했다는 말에 의아했지만 나중에 ‘다낭’에 놀러 가면 써먹을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거의 끝날 무렵… 남편의 회사가 베트남 회사를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베트남에 보낼 직원의 최우선 조건이 바로 이 언어 프로그램 이수라서 남편이 주재원으로 발령될 확률이 높아진 겁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최근 베트남이 한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재원이라고?'

뭔지 잘 몰라도 일단 기뻤습니다.


우선, 10년 넘게 다닌 회사 생활에 변화가 필요했던 남편에게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복되는 회사생활과 둘째 전담 케어로 심신이 지쳐있었던 남편 역시 해외근무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고요. 그러다 한편으론 ‘왜 하필 베트남이야. 유럽이나 영어권 나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주재원 와이프가 되는 거야? 완전 대박!’ 

친구들과의 단톡방은 난리가 났습니다. ‘너무 잘됐다… 부럽다… 이제 집안일은 끝인 거냐, 나 베트남 가면 재워달라… ‘

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되게 좋은 일이라는 건 친구들의 반응을 통해 즉각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친구들의 가장 부러워한 건 바로 ‘휴직’! 두 아이를 키우며 종일 근무에 야자 감독에… 지칠 대로 지친 저에게 예상하지 못한 휴직의 기회!


‘그래… 휴직을 할 수 있다면 미국을 가던, 베트남을 가던, 아프리카를 가던… 일단 콜!’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해외 근무 준비로 바빠진 남편은 베트남으로 출장을 몇 번 가더니 2월 말부터 하노이로 장기 출장을 떠났습니다. 배우자의 출장은 휴직 사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주재원으로 발령날 때까지 저는 휴직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남편이 출국하기 직전 두 가지 대박 사건으로 앞으로 닥쳐올 날들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1월, 가족여행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집으로 가기 전 ‘테디 베어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귀여운 곰들을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거든요.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신이 난 둘째가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다가 ‘풀썩!’하고 넘어졌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넘어지는 두 돌 된 아이라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 일어나!’하며 첫째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든 둘째의 왼쪽 눈에서 피가 수직으로 분출되고 있는 겁니다! 가재 수건으로 급하게 틀어막고 생전 처음 119 구급차를 탔습니다.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확인해보니 아이가 넘어지면서 의자 모서리에 혈관이 지나가는 눈 바로 옆을 부딪힌 거였습니다. 눈을 다친 건 아니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어째튼 찢어진 부분을 꿰매야 했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리고 눈 바로 옆이라 수면 마취를 하고 응급실에서 바로 수술을 했습니다. 그 후에도 드레싱과 실밥을 뽑으러 대학병원을 몇 번 들락거렸고요.


하지만 더 큰 수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첫째의 다래끼 수술.

4개월 동안 큰 아이의 오른쪽 눈 위에 다래끼가 없어지지 않고 사마귀처럼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동네 안과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대학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럼 아빠 출국하기 전에 하자는 생각으로 2월 초에 병원에 갔더니 기본 검사만 몇 번… 수술은 빨라야 3월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멘붕인 저를 남겨둔 채 남편은 출국했습니다.


새 학기를 맞아 학교에서 일 년 중 가장 바쁜 3월… 

저는 아이의 수술 때문에 3월 3주 연속 월요일에 연차를 써야 했습니다. 연차 허락을 받으러 머리를 조아리고 교장실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3월이라… 3주는 좀… 남편하고 번갈아가면서 휴가 쓸 수는 없나?"라고 교장선생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아... 남편이… 없어서요…"






이렇게 남편 없이 대학병원을 들락거리며 저의 고난의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큰 아이의 수술이 잘 끝나 더 이상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됐지만, 아빠의 부재와 함께 여러 가지 변화들이 우리 가족에게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같이 등원하는 사랑스러운 두 딸

우선, 큰 아이 백일 때부터 둘째 두 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아이들을 봐주던 이모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시게 된 겁니다. 어렵사리 새로운 이모님을 구해 개학 전 아이들을 적응시켰습니다.


그리고 26개월 둘째의 사회생활도 마침 그때 시작됐습니다. 큰 아이도 동생과 같은 어린이집으로 옮겼습니다. 타고난 눈치에 발달도 빠른 둘째는 며칠 좀 힘들어하더니 이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아기인 둘째가 가끔 울음을 안 멈출 때면 어린이집 선생님이 첫째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첫째가 동생을 안아주며 ‘언니가 2층에 있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잘 놀아!’라고 하면 둘째는 바로 진정하고 잘 놀더라는 선생님의 말에 두 아이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6살 첫째는 다행히 새로운 어린이 집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두 아이를 아빠 없이 양육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둘이 돌아가며 왜 이리 계속 아픈지… 점점 둘이 잘 놀기 시작하면서 커져가는 우애만큼 바이러스도 공유하는 듯했습니다. 6월에는 아이 한 명당 세 가지 질병에 걸렸습니다. 열감기, 수족구, 중이염… 이모님의 얼굴을 점점 초췌해갔고 혹시나 그만두신다고 하실까 봐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어째튼 아파도 좋고 어린이 집에 못 가도 좋으니… 제발 입원만은 안된다고… 

혼자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해외여행도 많이 안 해 본 남편은 처음으로 타국에 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들과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커가는 사랑스러운 딸들의 찰나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했습니다. 제가 부지런히 보내주는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는 아쉬움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영상 통화하고 주말이면 하루에 4~5번씩 영상통화를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남편은 떨어져 있는 기간 내내 우리를 보러 한 달에 한 번 한국에 왔습니다.

 

한복 입고 경복궁을 거니는 세 모녀

남편은 월요일 연차를 쓰고 금요일 퇴근 후 밤 비행기를 탔습니다. 토요일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에 오면 아침 9시. 밥보다 급한 잠을 좀 자다가 일어나 점심 먹고 일요일 저녁까지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월요일 아이들이 등원하면 제가 일하는 학교 근처에 와서 저랑 같이 점심 먹었습니다. 직접 아이들 데리러 가서 한번 더 놀아주고 바로 저녁 비행기로 하노이로 돌아갔습니다.


부산도 아니고 베트남인데…

떨어져 있는 동안 남편은 최소 한 달에 한번 한국에 와서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같이 소풍도 가고, 캠핑도 가고, 박물관도 가고, 한복 빌려 입고 경복궁에 가서 아이들 사진도 찍어줬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독박 육아의 어려움도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없이 아이들하고만 자는 것도 무섭고, 영상 통화할 때마다 울먹이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남편을 보며 꺽꺽 울기도 했는데… 반년이 지나고 나니 남편이 집에 오는 날이 빨리 돌아오는 것 같고 헤어질 땐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남편은 헤어지는 걸 점점 더 힘들어했습니다. 

8월에 주재원으로 정식 발령이 나자마자 저에게 아이들과 얼른 오라고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을 맡고 있고 다시 돌아올 직장이라 학년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데,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달에는 출장을 핑계로 한 달에 두 번 집에 오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독박 육아가 억울하기도 했는데…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었지만 사실은 아이들 때문에 제 삶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안정이 되는 저와는 달리, 남편은 퇴근 후 컵라면에 소주를 사들고 고급 레지던스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더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 어느새 추석이 되었습니다.

추석 첫날, 저와 아이들… 그리고 친정 엄마까지 모두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추석 연휴가 없는 베트남에서 평소처럼 근무하는 아빠도 만나고 우리가 살 곳을 미리 살펴보기 위해서요.

아이들과의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 걱정했는데… 어린 두 딸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듯 탑승전까지 엄청 신나 하다가 좌석에 앉자마자 늘 하던 것처럼 어린이용 헤드셋을 쓰고 능숙하게 화면을 눌러 뽀로로를 시청했습니다.


4시간 30분 후, 비행기는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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