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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우 Dec 29. 2022

끝과 시작

  한 해를 정리하는 긴 숨을 내쉬어본다.


춘장대해수욕장

  겨울 바다는 매력적이다. 짭조름한 바람은 그대로지만, 조금만 오래 있어도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여름 바다 특유의 먹먹함이 없다. 추위를 견딜 만한 준비가 된 상태라면 얼마든지 있고 싶다. 아마 소중한 친구와 함께했던 여행의 주된 배경이 겨울 바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남조 시인의 <겨울 바다>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씩 쓱 읽어보겠다는 다짐은 아마 그날 겨울 바다에 두고 온 모양이다.


<죽음과트라우마> 종강 축사. (사진 출처: 김현지 선생님 블로그)

  다시 읽어 봤는데, 내가 이 수업의 매력에 빠진 또 다른 이유는 교수님이 말씀하실 때의 짧은 호흡인 것 같다. '행복했습니다. 푹 빠졌습니다. 놀랐습니다. 감동했습니다. 기대됩니다.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서술어에서 느껴지는 가없는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참 아쉬운 수업이다.

  속이 단단하고 멋있는 척을 했는데, 잘 먹힌 것 같다. 사실 물러 터진 사람인데... 아무튼 80명의 수강생 중 내 진심이 닿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번 학기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범대 본관 계단에 있는 창문으로 보이는 전경

  졸업을 앞두고 계단을 오를 때면 매일 보던 풍경들을 이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워서 사진으로 남겼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4층을 오르며 '오늘 운동은 이걸로 끝이다.'라고 생각했던 나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여수 밤바다

  충동적으로 밤 11시쯤 밤바다를 보러 여수에 갔다. 인생네컷을 찍은 것 빼면 한 게 없었지만, 참 행복했다.


첫눈

  첫눈이 온 날도 행복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다. 멍하니 앉아서 잡념에 빠져 있던 내게 '나와 술 마시게'라고 해 주어서 좋았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집이 먼 친구들이 택시를 못 타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다들 집에 잘 갔다. 흰 눈처럼 깨끗한 날이었다.


자동차 캐럴 극장

  저녁도 먹었겠다, 딱히 할 게 없어서 그냥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게'라고 한 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갔다. 그리고 캐럴을 틀었다. 겨울비와 캐럴. 어쩌면 겨울에는 눈보다 비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뮤지컬 <빨래> 무대 사진

  올 해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고야 말았다. 뮤지컬 <빨래> 회전문을 돌면서 반드시 '싸인석' 티켓팅을 성공하리라는 내 다짐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었다.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매를 취소했기 때문에 올 해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예매 대기를 해 놓은 좌석 알림이 떠서 바로 예매를 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만, 말 그대로 '알 게 뭐야?'였다. 2막 시작 전에 아마 나는 배우 분들보다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집에서 맹연습했던 셀카 포즈로 찍었는데, '빵'이 내게 '요즘 말로 힙하게 사진을 찍으시네요'라고 해서 너무 웃겼다. 내 자세가 얼마나 웃겼을까.

  이 날 뮤지컬이 끝나고, 느긋하게 지하철에 올라 내려가는 버스를 예매하려고 보니 전석 매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매를 해 놓고 안 탄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 타도 되는지 매표소 직원 분께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터미널에 도착했다. 평소 나 같았으면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매표소로 달려갔을 텐데, 화장실부터 갔다. 이상하리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매표소 앞에 도착하는 순간, 버스 예매 어플 상에 좌석 하나가 떠서 바로 예매를 했다. 신기했다. 지금까지 매사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는데, 내가 '전전긍긍'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많은 걸 얻은 날이었다. 전전긍긍하지 말 것.


  감독의 전작보다 덜 슬펐는데, 어떤 장면에서 눈물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영화 자체가 슬퍼서라기보다는 어떤 장면에서 내 경험이 떠올라서, 그 생각 때문에 조금 심하게 훌쩍였다. 나만 우는 것 같아서 참 민망했던 날. 감정에 솔직한 것이 어쩌면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피부로 깨달은 날.

교과서 정리 아르바이트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고, 축 처진 기분으로 살아가는 나를 위한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바로 새로운 일이다. 하루지만, 한 중학교에서 교과서 분류 및 정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왔다. 별 거 아니겠지 생각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다녀왔는데, 큰 오산이었다. 나는 손톱이 부러졌고, 친구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도저히 안 되겠다며 저녁 일정을 취소했다. 몸이 바빠지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몸이 힘들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서 행복했다.



  임용시험은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교육학 점수가 생각보다 많이 높았다. 책 안 본 지 6개월이 됐는데 저 점수라니.. 아쉬움 뒤에 약간 반짝이고 있는 희망을 봤다. 입직하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겠다. 나를 갉아먹을 시간도 아깝고, 그러기엔 내 삶은 많이 소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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