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이야기는 없는 일상
거문도 발령 후 1개월 하고 절반이 지났다. 처음에는 이곳으로 발령을 낸 상황에 대한 분노가 매우 컸었다(물론 지금도 있음). 그래도 함께 근무하는 행정실 사람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라, 곧 있을 정기 인사발령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큰 요즘이다. 그리고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들이 성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 별개로 나는 요즘 차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복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
이러나저러나, 하루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쌓이는 기억들을 또 한번 오랜만에, 모아 보기로 했다.
관사에서 마트에 가려면 차량 없이는 왕복 1시간이 걸린다. 군것질을 못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기꺼이 간식거리를 잔뜩 준비해 놓는 센스 있는 여자친구를 둬서 행복하다.
내겐 애착인형이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 누나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라서 그렇다. 지금까지도 잘 때 그 인형을 가지고 잔다(오늘 오랜만에 인형 빨래를 하기도 했음). 아주 오래돼서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돈데,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기괴하다, 이게 뭐야?, 징그럽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 인형을 자신의 수업에 등장시킨 김지민씨. 아이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곰돌아!
아, 껍질이라는 이름은 고등학교 때 선우가 껍질밖에 안 남은 곰돌이를 처음 보고 '껍질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생긴 두 번째 이름이다.
이 날은 내가 거문도에서 나와서, 녹동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여수로 온 날이다. 여수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전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지형이가 선뜻 마중을 나가고 싶다고 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미안하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기차를 함께 타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니까, 욕심을 좀 부렸다. 나를 기다리며 카페에 있는 예쁜 지형이.
기차에 오르기 전, 맛있는 삼다수를 귀엽게 들고 있는 지형이.
지형이랑 맛있는 저녁을 먹고 갈 만한 카페가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골목 멀리에서 은은한 불빛이 나는 걸 보고 동시에 '저기 가 보자!'라고 하고 나서 간 카페. 알고 보니 유명한 카페였다. 커피 맛도 좋았고, 지형이와 함께한 저녁 시간도 좋았다. 무엇보다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는데, 꽤 괜찮은 집이었다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지형이와 함께할 시간들이 대체로 이렇게 흘러갔으면.
목련이 예뻐서 저기에 서 보라고 하려던 찰나, 지형이가 '나 저기서 사진 찍어줘.'라고 했다.
세병호는 참 좋은 기억이 잔뜩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내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인데, 거길 지형이랑 올 수 있어서 좋았다. 지형이가 처음 와 본다고 해서 또 더 좋았다. 바람이 불어 조금 쌀쌀했는데, 지형이가 추워 보여서 카디건을 벗어줬다. 반팔 차림도 괜찮아서 그냥 있었는데, 이때 감기에 걸렸다. 다시는 객기를 부리지 않겠다.
지형이가 원하던 식물도 무사히 찾았고, 계획했던 대로 소양으로 향하던 중 길가의 벚꽃 나무에 꽃이 하나도 피어있지 않은 걸 보고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소양은 언제든지 올 수 있는데 벚꽃은 시즌제니까 만개한 곳에서 예쁜 지형이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이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차를 돌려 상대 벚꽃길로 향했다. 그러길 잘했다. 꽃도 예뻤고, 지형이도 예뻤다.
이때 사무실이 좀 한가해서 전임자의 물건이 가득한 책상 정리를 좀 했는데, 지형이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했다. 진짜 데리고 와서 올려놓고 싶다.
지형이랑 맛있는 밥 먹고, 카페에 간 날. 역시나 너무 예뻤던 지형이.
카페 가기 전 나름 유명하다는 피자 전문점에 갔는데, 주문이 누락됐는지 3~40분 만에 메뉴가 나왔다. 사실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맛있어서 봐줬다. 하지만 지형이랑 오손도손 배달로 시켜 먹는 피자가 더 맛있다.
깐족거리다가 맞을 뻔했다. 사실 농담이고, 지형이가 갑자기 맥락 없이 주먹을 들길래 귀여워서 한 번만 더 해 달라고 해서 찍은 사진. 왜 주먹을 들었을까! 개박살 고양이(지형이의 51385번째 애칭)는 정말 귀엽다.
지형이랑 또 세병호에 갔다. 밤에 간 거라 더 좋았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 세병호에 갔을 때도 밤이었고, 거의 대부분 밤에 갔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들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산책길을 크게 돌아서, 길을 잠시 잃기도 했지만 길을 잘 찾는 지형이가 멋지게 바른 길로 안내했다. 지형이는 나와 만난 후로 항상 나를 바른 길로 안내한다. 거문도에서 부적응자로 살 뻔했던 날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카페에 들렀다. 귀여운 지형이가 카페에서 편지도 써 줬다. 로맨티시스트.
지형이 고향에 놀러 갔다.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빨리 간 것 같다. 강변에 차를 세워 두고 언젠가 생길 여자친구와 쓸 일이 있을 거라고 판단해서 2시간 동안 설치한 트렁크 매트를 적극 활용했다. 별 거 안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윤슬을 바라보는 것이 참 행복했던 날.
나는 버스 이 자리를 가장 좋아한다. 고속버스든 시내버스든. 시야가 탁 트여 있어서, 내가 운전하는 기분이 들어서 재밌기 때문이다. 특히 2시간 이상 운행하는 고속버스를 탔을 때는 꼭 이 자리에 타는 편이다. 잘 때 빼고는 앞을 바라보면서 레이싱 게임을 하는 기분을 즐긴다. 나만 그런가?
아무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요즘 자주 앉는다! 기분이 좋다.
난 생일에 크게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받으면 좀 그렇고, 그냥 기프티콘 몇 개 받으면 대개 만족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형이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원하던 것들을 모두 준비해 놨었다. 특히, 차량용 사쉐와 그 향과 동일한 핸드크림이 좋았다. 이렇게 엄청난 것들을 받았는데, 지형이의 생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지금부터 고민 중이다.
점심을 먹고, 학교 앞에 있는 카페에 갔다. 야외 자리에 앉아서 따사로운 햇빛을 만끽했다. 곧 출근을 하는 지형이가 많이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았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이날도 예뻤다.
지형이가 없는 동안 시간을 보낼 것을 찾다가, 진호가 심심하다고 카톡을 보내서 만나자고 했다. 임실에 가서 진호와 함께 진안 끄트머리에 있는 어떤 카페에 갔다.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라서 신기했다. 찹쌀 도나스 1+1이라고 해서 4개 집었는데, 알고 보니 백미 도나스만 1+1이어서 3개 값을 치렀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생겼었는데 .. 아무튼 그래도 맛있었다. 진호가 시킨 시그니처 커피도 맛있었다.
진호가 '섬 생활은 할 만하냐?'라고 물어보자마자, 그간 쌓인 불만과 폭언 및 모독 힐난이 쏟아져 나왔다. 막내급 주무관들의 대화는 발칙하고 매콤했다. 비슷한 처지라서 그런지 서로 열을 올리며 대화를 했다. 후 ..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진호가 에어프라이기로 통삼겹 바비큐를 해 준다고 해서 진호 집으로 갔다. 많이 해 본 듯, 고기에 소금과 파슬리를 묻히고 맛있게 구워주었다. 비계 쪽 씹을 때 입 안이 다 헐긴 했는데 맛있었다.
이날 진호가 생각보다 많이 불안해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았다. 나랑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 그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알 것 같았다. 친구 관계든 직장 문제든,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혼자서 꾹 참으며 버텨온 1년 반이 넘는 시간들 속에서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그래도 진호라서 지금까지 버틴 느낌이 들어서, 정 힘들면 상담이라도 받아보라고 내가 뭐라고 조언을 했다. 사실 진호에게 필요한 건 상담이 아니라 사람인 것 같지만. 진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지형이와 함께한 첫 여행지는 변산반도였다. 채석강에 가서 예쁜 사진을 찍었다. 해식 동굴도 보려고 했는데, 물이 들어오고 있어서 통제를 받아 아쉽게 못 봤다. 다음에 보면 되지!라고 하며 쿨하게 왔던 길을 돌아왔다. 물 들어오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무서웠다. 인간은 대자연을 이기지 못한다.
지형이가 나온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 나온 사진이 없는데, 그 이유는 여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형이가 하사한 꼬까옷이다! 가보로 모셔야지.
여기서 꼬까옷에 제육 양념 튀어서 화장실로 뛰어가서 5분 동안 빨래했다.
지형이랑 점심 먹을 곳 찾다가 우연히 찾은 곳인데, 진짜 엄청 맛있었다. 손님들 보니까 전부 다 지역 주민인 것 같았다. 지역민이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항상 짜장면 먹으면서 2%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기 볶음짜장이 진짜 내가 생각하던 그 2%가 채워진 맛이었다. 나중에 지형이랑 또 가야지.
모자이크 넣으면서 또 느꼈다. 모자이크 클릭을 하면 기본 크기의 모자이크가 생성되는데, 지형이는 그거 크기 조절 안 하고 갖다 놓으면 머리 전체가 가려진다. 근데 나는 조금 키워야 한다. 그렇다. 아무튼 이 사진들 다시 보니까 예쁘게 진짜 잘 나왔다.
오전에 일어났을 때부터 뭔가 일요일에 거문도로 들어갈 배가 안 뜰 것 같았다. 바다 기상이 너무 안 좋아서 선사에 문의해 보니 오후는 돼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가기로 했던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진심을 다해 축복을 하면서도, 계속 여객선사의 밴드 공지를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뷔페를 먹다가 선사에 전화를 했더니, 배가 안 뜰 거라고 했고 동시에 오늘 오후 4시 배가 이번 주말 마지막 배라는 공지를 받았다. 그때가 오전 11시 55분경이었다. 오후 4시 배를 탈 곳은 녹동항이고, 전주에서 2시간 30분이 걸리는데, 넉넉하게 1시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럼 난 1시간 후에 전주를 떠나야 한다는 것. 눈앞이 아득해졌다. 겨우 한 그릇 먹었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갑자기 땀이 났다. 지형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지형이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무척 당황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게 생이별이지 .. 아무튼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보이는 대로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 길로 지형이한테 가서, 정말 갑작스럽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게 뭔가 싶었다. 이 글 첫머리에 썼던 그 분노가 다시 정점을 찍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더 축축 처졌다. 그리고 나도 나지만, 혼자 남겨질 지형이가 눈에 밟혔다. 원래 저녁에 오랜만에 칵테일 바 가서 데이트하기로 했었는데. 이게 어른이 되는 길인가? 어른 하기 싫었다.
결혼식을 통해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끼리 밤까지 술을 마시는 게 SNS에 올라와서 부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그때쯤에는 수용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에, 그렇게 울적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지형이가 함께해 줘서 힘이 됐다. 서로에게 힘이 됐다.
갑자기 섬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생수가 없다는 걸 관사에 도착해서 알았다.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안면이 있는 식당에 가서 정수기로 물을 떠 왔다. (지독)
아무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 좀 적응을 했나 싶다가도 아직은 덜 된 것 같기도 하다. 적응을 할 만하면 어제 같은 일이 생겨서 그런 것 같다. 바다에는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도 하는데,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를 찾지를 못하겠다. 열심히 찾아봐야지. 지형이가 함께 열심히 찾아주고 있으니까.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어제도 관사에 들어와서, 마침 관사에 오랫동안 있을 수 있으니까 대청소나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보지도 않는 TV를 베란다로 치워버리고, 먼지도 털었다.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던 책도 박스를 조립해서 박스에 넣었다. 그래도 내가 생활하는 공간인데, 여기에 있기 싫다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방치하던 짐들은 내 마음의 짐이 되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깨끗하게 치우고 나니 살짝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음 주에 출장으로 조금 일찍 뭍으로 나갈 수 있을 거다. 더 나아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