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

[KTX매거진] 대전, 거리 두고 걷기 여행

가을도 줍고 낙엽도 밟고

by 우주

지친 몸과 마음을 대전의 자연에 맡기고 걷는다. 든든한 땅, 대전의 가을이 위로를 전한다.


사랑하니까 멀어져야 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서로의 간격을 넓히는 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됐다. 몸의 언어로 거리 두기를 실천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너그러운 품속에서 헛헛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다. 풍요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했으니 모든 걸 다 내어 줄 듯, 힘 있게 안아 주는 자연을 찾아 대전으로 떠났다. 너른 들판이란 뜻을 지닌 도시, 대전의 물과 나무, 갈색 대지가 여행자를 반긴다.


낭만의 시작, 대청호 오백리길

KTX를 타고 대전역에 내린 후, 망설임 없이 차로 20분 거리의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으로 향했다. 대청호 오백리길 중에서도 호반낭만길이라 불리는 곳이니 몽환적인 호수 풍경을 만날 수 있을 테다. 4구간 출발 지점부터 수면의 윤슬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호수를 두른 12.5킬로미터의 산책로는 울창한 숲속 나무 덱과 흙길을 오간다. 걷는 내내 멀든 가깝든 대청호가 곁을 지킨다. 자연을 느끼러 왔으니 최대한 물가로 다가선다.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물결도 덩달아 바빠진다. 일렁이는 물살이 뭍에 닿아 찰랑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파도가 이는 바다를 마주하고 선 것 같다. 1980년 대청댐 건설과 더불어 탄생한 대청호는 대전, 충북 옥천․보은․청주 등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호수다. 전체 둘레 247.5킬로미터의 대청호 오백리길은 21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그중 1구간부터 5구간, 21구간의 일부 코스가 대전에 속한다(문의 042-273-5550).

저 멀리 무리 지어 이동하는 하얀 새들이 보인다. 4구간의 마스코트인 거위 가족이다. 20여 마리의 거위가 7~8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수면 위를 유유자적하며 탐방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거위도 반한 대청호의 자연, 그중에서도 가을날의 숲길을 걸으니 도토리와 밤송이가 발에 차인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둘 줍다가 이내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작은 열매지만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동물에겐 소중한 양식일 것이다.

산책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올해 새롭게 조성한 명상 정원에 닿았다. 탁 트인 호수 전망에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이곳이 배경 중 하나인 드라마 <슬픈 연가>, 영화 <7년의 밤> <역린> <창궐>의 분주한 촬영 현장을 상상해 본다. 카메라 감독이 된 기분으로 하늘과 맞닿은 호수,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같은 수려한 풍광을 영상으로 남겨 보는 것도 재밌겠다.


온통 향기로워라, 한밭수목원

대청호의 맑은 기운을 한 아름 안은 채, 도심에 위치한 한밭수목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의 옛 지명인 한밭이란 이름이 붙은 수목원이니 별다른 설명 없이도 멋스러운 곳일 거란 짐작이 간다. 1993년 개최한 대전세계박람회 당시 주차장이던 곳에 2000년대 초반 나무를 심어 수목원을 만들었다. 세계박람회가 열릴 정도의 위치라면 대전에서도 중심일 터. 대전정부청사, 대전광역시청, 대전지방법원 등 관공서와 가까운 것은 물론, 수목원 전망대에선 KBS 대전방송, TJB 대전방송, 대전 MBC 건물이 보일 정도다. 2005년 숲속 산책로나 다름없는 서원을 선보인 후 2009년 아기자기한 정원인 동원을, 2011년엔 이국적인 실내 정원인 열대식물원을 오픈하며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38만 7000제곱미터(11만 7000평) 규모의 한밭수목원은 관목원, 생태숲, 목련원, 암석원 등 식생에 따라 30여 가지 테마원으로 나뉜다. 2200여 종의 식물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엔 새와 나비, 풀벌레가 자연스레 찾아오고, 서원의 습지원과 동원의 연못엔 서식하는 물고기가 차츰 늘어나는 중이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에도 최소한의 기간만 휴관하며 도심 속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도시락을 싸 온 시민이 소풍을 즐기는 공원, 근처 직장인의 점심시간 산책로, 연인의 데이트 코스 등 무수한 추억이 어리는 공간이다. 언제 방문해도 감동스러운 곳이지만 가을날의 수목원은 한결 더 매력적이다. 숙근아스타, 핑크뮬리, 촛불맨드라미 같은 가을꽃이 수목원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였다. 서원에서 동원까지 발길 닿는 대로 산책하다가 마지막으로 동원의 허브원에 들렀다. 체리세이지, 레몬버베나, 제라늄 등 여러 가지 허브를 문질러 향을 맡아 본다. 상큼한 내음이 코와 손끝에 묻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문의 042-270-8452).


그리움이 쌓이는 길, 국립대전현충원

이번 여정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마무리할 생각이다. 현충원에 도착해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등산복 차림의 사람이 꽤 눈에 띈다. 현충원 보훈둘레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1985년 갑하산 자락에 둥지를 튼 국립대전현충원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현충원을 빙 두르는 숲길인 보훈둘레길을 완성했다. 10년간 알뜰살뜰 가꾼 길은 총 10.04킬로미터, 일명 천사가 걷는 길로 불린다. 빨강길, 주황길, 노랑길, 초록길, 파랑길, 쪽빛길, 보라길 등 각각 1~2킬로미터가량인 7개 구간은 무지개처럼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인다. 둘레길 사이사이 마련해 둔 진입로를 이용해 원하는 구간만 탐방해도 되지만 대지의 온기를 받으러 왔으니 완주를 목표로 해 본다. 정문과 가까운 빨강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전나무, 소나무 등 하늘 높이 솟은 나무가 빼곡한 숲속으로 들어간다. 보드라운 흙의 질감이 새삼 반가워 발을 한번 굴러 본다. 귓가엔 새소리가 맴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나뭇잎 사이로 현충원이 아른거린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다. 대나무 숲이 맞아 주는 주황길과 노랑길, 배롱나무길이 인상적인 초록길을 지나 파랑길까지 부지런히 나아간다. 파랑길의 백미인 1004 전망대에 오르면 330만 제곱미터(100만 평)의 현충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푸른 잔디 위에 나란히 늘어선 비석, 그 앞에 선 사람들을 보다가 가슴 한편에 묻어 둔 이를 떠올린다. 그리운 이를 만나러 온 사람들과 자연에 기대러 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엇갈린다. 삶과 그 너머의 경계에 선 길이라니 기분이 묘해진다.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다시 힘을 내 쪽빛길과 보라길을 걸어 내려온다. 차를 주차한 정문 근처에 다다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문의 042-718-7114).


곧은 나무가 되는 법, 거리 두기

아쉽지만 떠나야 할 시간이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한밭수목원, 국립대전현충원 보훈둘레길까지 하루 동안 많이도 움직였다. 근심 걱정을 달래는 너른 호수, 늘 같은 곳에서 그늘을 만드는 나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대전의 자연 안에서 행복했다. 하루 종일 걷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동안 땅과 하늘, 햇살이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줬다는 사실을. 사랑해서 멀어진 게 아니라 사실 더 애틋해진 거였다. 거리를 둔다는 건 누군가에게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공허하다 여겼던 마음이 대지의 양분을 받아 풍족하게 차올랐다. 머지않아 몸의 거리도 마음의 거리처럼 가까워질 날이 오리라 믿으며 대전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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