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

[KTX매거진] 반려견과 떠난 청주 기차 여행

김상혁 시인

by 우주

‘개 있음에 감사’한 김상혁 시인과 그의 반려견 김살구가 충북 청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기차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 시작된다. 출발 시각에 맞춰 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맞이방과 타는 곳에서 기차를 기다릴 때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들뜨니 몸이 덩달아 들썩인다. 여행자의 설렘이 모여 기차역의 분주함을 만든다.

지난 1월 어느 날 아침, 서울역 맞이방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사람들의 표정에 반가움과 호기심이 번진다. 저 멀리 하얀 몰티즈 한 마리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타난다. 2013년

생, 올해 견생 8년 차를 맞은 김살구다. 이날 살구는 반려인 김상혁 시인과 난생처음 기차 여행에 나섰다. 반려동물과 떠나는 낭만적인 기차 여행을 준비할 땐 약간의 품이 든다. 케이지, 사료, 배변 봉투, 물티슈 등 필요한 것을 하나둘 챙기다 보니 온통 살구 짐이다. 시인은 책 한 권을 들고 기차에 올랐다. 대중교통인 기차로 이동하려면 반려동물을 위한 케이지는 필수품이다. 케이지 안에 자리 잡은 살구는 이번 여행을 위해 광견병 예방주사도 맞았다. 첫 기차 여행이니만큼 최대한 짧은 여정을 선택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약 45분이면 오송역에 도착한다. 한 시간 남짓이지만 편안한 여행을 위해 두 자리를 예매해 나란히 앉았다.

시인이 한 손으론 책을 받치고, 다른 손으론 케이지 안 살구를 쓰다듬는다. 단 한 번도 시인을 곤란하게 한 적 없는 살구는 다행히 금세 적응한 것 같다. 조용히 책을 읽던 시인이 문득 생각에 잠긴다. ‘살구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신이 났을까. 아니면 집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갑작스레 낯선 환경을 마주한 반려견의 마음을 헤아린다. 둘만의 여행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또 좋아해 주길 바랄 뿐이다. 목적지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충북 청주 여행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삶과 만나는 수암골 벽화마을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갈 곳 잃은 피란민들이 청주 우암산 자락에 기대 살아왔다. 비탈진 언덕에 눈과 비, 바람을 겨우 막는 판잣집을 짓고 수십 년을 부둥켜 살았다. 수동과 우암동에 걸친 달동네 수암골의 역사는 2007년 전환점을 맞이했다.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주도한 지역 작가와 대학생이 수암골의 일상을 포착해 벽화로 남긴 것이다. 목젖을 내보이며 웃는 아이, 단란한 가족,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풍물놀이를 하는 사람들까지 정겨운 풍경이 굽이진 골목마다 파고들었다. 이제는 어르신만 사는 동네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벽화 안에서 뛰논다. 살구도 코를 킁킁거리며 부지런히 탐방한다.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경사진 길을 걷다가 멈칫한다. 살구가 망설이자 시인이 방향을 바꾼다. 벽화를 살펴보는 동안 몇몇 주민이 눈인사를 건넨다. ‘근면, 자조, 협동’ 세 단어가 쓰인 벽화를 보며 이곳 주민들의 성실한 하루하루를 떠올린다. 벽화마을이 품은 기나긴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몇몇 담벼락은 방문객의 그림으로 꾸몄다. “수암골은 행복한 겨?” 누군가 동네의 안위를 묻는다. 그 주위로 수줍은 고백이 연달아 나온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삶의 더께가 두터운 마을에서 사람들은 소중한 무언가를 기리나 보다. 그래서인지 어느 담벼락에 그려진 나무엔 우정, 사랑, 행복, 가족, 친구라고 적힌 나뭇잎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시인과 살구의 산책이 이어진다. 강아지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로 했다. 아마도 이 집에 살던 강아지를 그린 게 아닐까. 벽화 옆으로 “배고픈 개에게 고기를”이라는 문구와 작은 개구멍이 보인다. 구멍 너머 마당엔 연탄재와 잡초가 뒤엉켜 있다.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던 개는 이 구멍으로 세상을 구경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 그 개 대신 벽화 속 강아지가 오가는 사람을 반긴다. 동네의 평온을 지키는 또 다른 정체는 바로 연탄이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좁은 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여기저기 웃고 있는 연탄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 사람들은 벽에 이어 연탄에도 표정을 새겼다. 2017년 마을에 도시가스가 들어와 더 이상 연탄재는 나오지 않지만 눈, 코, 입을 지닌 연탄재가 말을 걸어온다. “우린 이 차가운 세상에서 따스한 존재들이었어! 봄은 말이야. 설렘 속에서 천천히 더디게 오는 거란다. 날 위해 웃어 줄래? 넌 웃는 게 예뻐!” 달동네의 겨울을 포근하게 안아 주던 연탄은 재가 되어서도 우리를 보듬는다. 연탄재를 잠자코 바라보던 시인이 추억 하나를 꺼낸다.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는 연탄보일러였는데, 베란다에 쌓인 연탄을 보면 참 든든했어요. 연탄은 모두에게 그런 기억이겠죠. 새벽녘 할아버지가 연탄을 갈던 모습도 눈에 선해요.”

연탄의 응원에 힘입어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전망대다. 벽화마을은 물론, 멋진 테라스를 갖춘 카페가 늘어선 수암골 카페거리가 내려다보이고, 시야를 넓히면 청주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전망대를 비롯해 마을엔 의자와 평상이 많아 쉬어 가기 좋다. 시인과 살구도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동네의 고요를 즐긴다.


조화로운 풍경의 정북동 토성

벽화마을을 둘러보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하다. 일몰이 아름다운 정북동 토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호천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에 흙으로 올린 성은 2~3세기경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주변을 다진 흙으로 단단하게 쌓았다. 초창기엔 당시 백성이 수확한 곡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던 용도였다고 한다. 높이 1.5~3미터가량의 낮은 성이 도대체 무얼 어떻게 지켰다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지만 과거엔 더 높았을 것이다. 수천 년간 바람과 비, 사람이 토성을 조각했다. 그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사람의 발자국이 파낸 계단을 밟고 토성 위로 오른다. 전날 내린 비로 흙의 질감이 촉촉하다. 흙길을 걷는 게 얼마 만인가. 토성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살구가 앞장선다. 어느 지점엔 나무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나무가 빽빽하던 토성은 2000년대 초반부터 청주시가 이곳을 정비하면서 본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다섯 그루의 나무가 토성과 어우러진 풍광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무 그늘에 서서 김상혁 시인의 시를 읊어 본다. “어떤 사람에겐 나무가 꼭 필요해. 잘 살기 위해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그 소리를 듣는 일이.”(‘어떤’ 중에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귀 기울일 나무가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다.

토성 밖 너른 들판 사이로 움푹 파인 도랑 두 줄이 눈에 박힌다. 도랑 깊숙이 뾰족한 나무를 심고 물을 채우면 성의 방어력이 높아진다. 발 딛고 선 야트막한 언덕에서 이곳이 외부의 침입을 막는 성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약 1700년의 역사를 감내한 토성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이었다. 집을 짓고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네 곳의 우물터가 증명한다. 곳간 역할을 하던 곳이 작물을 기르는 곳으로 그 형태를 달리했고, 오늘날엔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또다시 그 품을 내어 준다. 이곳은 사람과 개를 위한 놀이터이기도 하다. 성벽 밑으로 내려온 살구가 들판을 힘차게 가르자 목줄을 꼭 쥔 시인도 뒤따른다. 도시에서 이토록 드넓은 흙길을 달릴 기회는 흔치 않다. 많은 사람과 개가 산책하는 장소답게 ‘목줄은 2미터 이내로, 대형견은 입마개를 해야 한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사방을 살핀다. 노을빛으로 물든 들판이 반짝인다. 붉은 하늘이 점점 내려와 지평선에 맞닿는다. 태양이 사라지니 어둠이 내리고 시인과 살구도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사랑의 온기를 나눈 하루

오송역 맞이방에서 청주 여행을 되새긴다. 흙 묻은 살구 발을 어루만지던 시인이 입을 연다. “살구에게 만족스러운 하루였는지 궁금한데 알 수가 없네요. 살구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지만 그게 어렵죠. 항상 미안해요.” 시인 부부에게 살구는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살구라는 이름에 오래 살라는 염원을 담았다. 시인과 아내의 성을 따 김살구라 부른다. 2017년 시인의 아들이자 살구의 동생이 태어나 온 가족이 육아에 전념했다. 살구도 제몫을 다했다. 그래서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 살구를 바라보는 시인의 얼굴은 그저 해맑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편안함이 엿보인다. 흔들림 없는 시인의 눈빛을 받아 내는 살구는 그곳이 어디든 행복할 것이다. 시인과 살구가 한 번 더 기차에 오르고, 서울행 KTX가 오송역을 출발한다. 기차 안에서 시인은 살구와의 다음 여행을 구상한다. 머지않아 아내와 아들까지 네 가족이 기억할 만한 풍경으로 떠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둘만의 첫 기차 여행이 차창 밖 흘러가는 경치와 함께 막을 내렸다.


INFORMATION

반려동물과 기차 여행 준비하기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기차 여행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기차에서는 꼭 전용 케이지를 이용해야 한다. 만약을 대비해 예방접종 증명서도 소지하는 것이 좋다. 투견종, 맹금류, 뱀 등 다른 승객에게 두려움을 주는 동물은 탑승할 수 없다. 목줄 등 안전 조치를 한 장애인 보조견은 해당 규정에서 제외된다. 반려동물 좌석을 별도로 구매할 경우, 어른 운임을 적용한다.


김상혁 시인

2009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을 펴냈다. 지난해 시인 스무 명이 모여 출간한 시집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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