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진 기행
진품 미켈란젤로 다비드를 만나러 갈 시간. 유로 자전거나라에선 투어 가이드 상품이 없어 구하지 못했으나 에어비앤비에서 Skip the line (줄서지 않고 입장)을 판매하기에 예약을 했다. 가격도 좋고 설명도 좋다. 단지 문제라면 가이드가 영어로 설명을 하니 이게 문제. 미국에서 영어로 역사를 배우지 않았으니 한국어 가이드보단 받아 들이는 감이 떨어진다.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고 손으로 느껴야 제대로 감이 오는데 그게 안되니 아쉽다.
단체 관광객 투어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스킵 더 라인이다. 얼마 되지 않는 돈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정면에서 바라본 다비드는 역시 큰 머리에 숏다리. 애당초 계획은 두오모 성당 돔 하단 지붕 라인에 설치할 예정이었고 미켈란젤로는 의뢰한 대로 정확히 만들었다. 그러니 대두와 숏다리는 미켈란젤로 잘못이 아니다. 오른발에 무게 중심을 두고 왼발을 앞으로 내딛는 듯한 자세에 양쪽 어깨 또한 동작을 취하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일명 짝다리 콘트라포스토. 잔뜩 뭉쳐있는 목 주위의 근육은 전투 직전의 긴장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다.
전통적인 다비드상은 골리앗과의 전투 이후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이전의 조각가 도나텔로와 그의 제자 아고스티노, 그리고 다음으로 작업을 맡은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미 발과 다리 부위를 손을 댄 상태여서 골리앗의 머리를 표현할 대리석의 여분이 없었기 때문. 그래서 전투 이전의 긴장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작풍의 주제를 변경한 것이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근육과 힘줄의 디테일뿐만 아니라 짝다리 뒷대의 엉덩이 접힌 부분까지 리얼하게 묘사를 했다. 지붕 위 꼭대기에 있으면 누가 본다고, 팔뚝에 붙어 있는 먼지가 솜털처럼 느껴질 만큼 피부의 감촉까지 리얼하다.
다비드상의 최대 약점이 대리석 조각의 두께가 규모에 비해서 얇다는 것인데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이 의뢰되기까지 그 이전에 거쳤던 조각가에 의해 이미 여러 차례 손질이 된 상태였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어진 거대한 돌덩어리 "Giant"를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어 세울 것인가만 미켈란젤로의 과제였던 것. 그래 이런 게 아모르 파티 (Amor Fati)지. 멋지다.
본인에게 작업이 맡겨지기 전에 이미 몇 명의 조각가가 작업하다 실패한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받아 들고는 3년에 걸쳐서 29살 되던 해에 완성한다. 컨셉에 대한 고민을 2년 넘게 했다고 하니 그 고민이 어떠했을까 싶다.
긴장된 표정의 다비드로 선택을 한 이유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은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그 사연이 궁금하여 또 한 번 찾아본다.
때는 바야흐로 메디치 전성시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총애를 받고 인문학 수업과 회화 조각 등의 미술수업까지 받으면서 로렌초의 양자로 입양까지 되는 미켈란젤로. 잘 나갈 듯 보였으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상태에서 감자기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로렌초의 장남 피에로는 인문학이고 예술이고 다 집어던진 아무런 식견이 없는(이라고 쓰고 무식한 이라고 읽는) 개망나니. 눈 오는 날 미켈란젤로한테 커다란 눈사람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하니 오죽했을까 싶다.
피에로와의 마찰을 피해 로마에 있다가 피렌체 공화정 수립 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쫓겨난 피에로 데 메디치가 다시 피렌체로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다비드를 긴장된 자세를 취하고 로마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넣었고 이마는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눈동자가 하트 모양인데 사랑의 하트가 아니라 눈빛 이글거림의 그 당시 표현. 하기사 사랑의 하트와 증오의 이글거림은 같은 말 다른 표현이긴 하다. ^^
그로부터 8년 후 피에로는 교황 레오 10세(피에로의 동생)에게 군대를 얻어서 피렌체로 쳐들어 왔고 후에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미켈란젤로와 메디치 가문 사이에 흐르던 어색함을 고려해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카데미아에 들어서면 다비드 상에 가기 전에 양 옆으로 사진과 같은 미완성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렌체 대성당의 내부에 12제자 조각상 의뢰를 받고 작업을 하던 작품들 중 성 마태의 모습. 미완성 작품이지만 대리석의 품질은 다비드 것보다 더 좋다. 품질 좋은 대리석은 세월이 지나도 완성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품질 떨어지는 큰 대리석은 3년간 머리 싸매고 완성하고 만다. 미켈란젤로의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았고 내가 그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조각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12 제자 대리석 조각은 완성하지 못하고 역대 교황 중 가장 막무가내에 가까운 율리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한다. 그에겐 피렌체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돔 지붕에 올렸을 때를 가정하여 아래에서 쳐다봤을 때의 모습. 역시 얼짱 몸짱은 각도가 따로 있다. 비율이 믓찌다.
<예술가 열전>의 저자이자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한 작가이자 예술가인 조지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면 그 어떤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라고 극찬해 마지않는다.
아카데미아를 나오니 바깥에서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들이 입장할 때까지 2시간은 족히 걸리지 싶다. 입장 가능한 인원 수가 정해져 있어서 들어간 손님들이 나와야 그만큼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 그래서 가이드가 있는 그룹 투어가 아무래도 빨리 나오니까 별도 라인으로 우선 입장을 시켜주는 것이다. 이제 다비드를 세우려 했던 두오모 돔으로 올라가 보자.
원래 다비드를 설치하려고 했던 곳에 대한 설명이 돔 아래라는 기록도 있고 돔 천장이라는 기록도 있고 돔의 동쪽이라는 기록과 북쪽이라는 기록이 혼재하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돔 천장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랜턴 근처인 줄 알았다. 그래서 원문을 검색하여보니 "above transept(익랑)"라는 얘기와 "atop of butress"라는 얘기가 나온다. 익랑은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것이니 북쪽과 남쪽 두 군데가 있다. 그리고 버트레스는 사진의 동그라미 표시한 부분의 경사진 벽을 말하는 것이니 북쪽 남쪽 동쪽에 4군데의 포지션이 있어 구약에 나오는 12 인물의 조각상을 설치하려고 했던 계획과 일치한다. 처음엔 두오모 쿠폴라 위쪽인 것으로 이해를 했는데 그곳은 8 각형이라 12개의 설치 위치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위치를 정확히 잡았으니 새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살펴보자.
바로 저기! 다비드를 올려놓으려고 했던 곳이 어딘지 이제야 보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뇌가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봐도 안 보인다.
다비드 위치를 확인했으니 이제 쿠폴라(돔)로 올라간다. 예약을 하고 오더라도 대기줄이 있어 30분 정도는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입구 위를 바라보니 대리석 장식이 가관(可觀)이다. 저 많은 조각들을 한 땀 한 땀 깎아내고 다듬어서 성당의 벽을 장식한 르네상스를 풍미했던 피렌체의 예술가들 덕분에 미친 예술혼의 진수를 만끽(滿喫)한다.
92미터 높이 463계단의 첫발. 성당의 두오모 꼭대기를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설계 단계부터 만들어 놓은 브루넬레스키도 대단하고 관광객들이 올라갈 수 있게 허용하는 성당도 대단하다.
조르지오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그린 두오모 돔의 천장화, 최후의 심판. 랜턴 근처 가운데 부분은 조르지오 바사리가 완성한 요한 계시록 4장의 24명의 장로. 그의 사후 페데리코 추카리가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 없는 행복을 그렸고 돔의 제일 아랫부분에 중대한 죄와 지옥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르지오 바사리가 그린 부분은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전통 프레스코 (buon fresco) 기법이라 오늘날까지 그 보존상태가 훌륭하고 선명하지만 추카리가 바사리 사후에 그린 기법은 회반죽이 마른 후에 그리는 프레스코 세코(fresco-secco) 기법으로 그려서 색상이 바랬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가 있다. 차마 프레스코 기법으로 저 넓은 천정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 조르지오 바사리는 랜턴 근처 천장의 조그만 프레스코 벽화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으니 4년 만에 완성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인간의 작업이라고 할 수가 없다.
천장화를 보고 나면 본격적인 돔 계단이 시작된다.
돔의 숨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피렌체 시가지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드디어 빛이 보인다. 500계단도 안 되는 높이를 올라왔는데 출구가 이리도 반갑다. 올라오는 계단이 중간에 쉬는 공간이 없어 내가 서면 뒤에 오는 사람도 서야 하는 민폐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숨이 턱에 차올라와도 그냥 올라가야 한다.
돔 정상에서 피렌체를 360도 즐긴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단테, 마키아벨리가 묻혀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이 왼편으로 보이고 오른쪽 언덕 위로 보이는 것은 미켈란젤로 광장.
저 멀리 종탑이 보이는 언덕이 기원전 6세기에 생긴 피에솔레라는 곳. 피렌체는 400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에 피에솔레의 식민도시로 생긴 것이라고 하니 일정을 맞춰서 다녀 올 예정이다.
두오모 전망대보다 10미터 낮은 높이 82미터(지붕까지 85미터)의 조토의 종탑.
랜턴은 부르넬레스키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공사를 시작하여 친구인 미켈로초가 1461년에 완성한다. 돔 공사하는데 16년 걸렸는데 랜턴 공사에만 15년이 걸린다. 리더의 부재로 인한 잦은 설계 변경 때문. 원뿔 형태의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를 베로키오가 1469년 완성한다.
부르넬레스키가 고안한 기계 장치를 이용하여 베로키오가 구리 공을 올렸는데 그 당시 견습생으로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노트에 스케치를 몇 장 남겨 놓았다. 그것이 다빈치 사후에 발견된 노트에 있어서 다빈치가 개발한 것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르넬레스키가 설계도와 기계장치 도면 등의 모든 서류를 폐기 처분하여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빈치 노트에 있는 그림이 다빈치 것이라고 해도 달리 주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기록은 사용하는 자의 것이니 잘 기록하고 잘 사용해야 한다.
부르넬레스키가 처음으로 한 것이 기중기 같은 기계 장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브루넬레스키의 달걀>이 될 수 있었던 기록이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1565년 발표한 지롤라모 벤조니의 <신세계의 역사>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보다 15년 앞선 1550년 발간된 조르지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달걀을 깨뜨려 세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러 차례 실패한 돔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물어보는 대목에서 달걀을 깨뜨리며 "돔의 비법은 막상 알고 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방법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답변을 거부했고 공사를 마친 후에는 기록을 다 없애 버렸으니 그에게 돔 건설작업 그 이상의 <브루넬레스키의 달걀> 같은 크레딧이 주어질 여지가 없었던 것.
돔을 내려오면 출구 쪽에 두오모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캄비오(왼쪽)와 돔을 완성한 브루넬레스키 동상이 보인다. 돔을 바라보는 천재의 눈길이 사뭇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