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촌자 Sep 23. 2020

비와 얼음, 그리고 바람의 서사시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Bryce Canyon National Park

LA를 출발하여 메스퀴트에서 1박을 하고 브라이스 캐년으로 들어선다.

89번 도로를 타고 딕시 국유림을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밍숭 밍숭 하던 풍경이 12번 도로에 들어서면서 붉은 기운이 진하게 펼쳐진다.

미국인들의 국립공원 즐기기는 참으로 다양하다. 공원 입구에서 만난 자전거 부부. 전기자전거를 준비했으니 돌아올 때 오르막 걱정 없이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이곳은 자이언 국립공원과 같이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브로셔에는 대부분의 포인트들 (선라이즈, 선셋, 브라이스 포인트, 인스퍼레이션 포인트 등)이 20피트 초과 RV 차량 진입금지. 하지만 자이언처럼 모든 곳이 출입금지는 아니니까 겁먹지는 마시라. 

이번 일정이 정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곳 캠핑장. 취소된 사이트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급하게 일정을 잡게 된 것인데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는 국립공원 내부 캠핑장 숙박. 하루 1박에 3만5천원인 것은 덤. 그걸 알고 나면 빈자리가 생기면 일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무조건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6개월 전에 기다렸다가 예약을 하면 된다. 

2곳 캠핑장 모두 선라이즈 포인트, 선셋 포인트까지는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 

협곡은 협곡인데 그랜드 캐년이나 자이언 캐년의 그것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랜드캐년에는 콜로라도 강이 있고 자이언 캐년에는 버진 리버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이 없다. 그래서 강이 만들어 놓은 와일드 함도 없다. 

강(江) 대신 비와 얼음 그리고 바람이 거대한 바위를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조각하고 그것들을 원형극장(amphitheater) 안에 침엽수와 함께 줄 맞춰 세워 놓았다. 1년 중 200일 이상 영하의 기온을 보이는 날씨 덕분이다.

관중석도 보이고 선수들도 보이는 것이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보는 듯하다. 

막상 예전 사진첩을 열어보니 비교를 할 대상이 아니다. 규모도 그러하거니와 디테일조차 따라갈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 10,000명이 달려들어도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디테일.

남서부 4개 주 (유타, 애리조나, 콜로라도, 뉴멕시코)에 걸쳐있는 콜로라도 고원지대에서 최상층부에 해당하며 가장 젊은 지층이라고 하는데 2억 년 전부터 공룡이 멸종하기 직전인 640만 년 전까지 형성된 클라론 포메이션 지층. 억겁의 세월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바위틈이 조금 커 보이는 곳이 나바호 트레일의 월스트리트 구간. 그 속으로 한걸음 들어가 본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한 바퀴 도는데 2.8마일의 짧은 코스이며 고도차 597피트, 182미터로 크지 않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에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트레일인 퀸즈 가든 트레일과 중급의 나바호 트레일을 합쳐 놓은 것. 하지만 장시간 운전을 하고 온 탓인지 밤새 다리에 쥐가 나서 잠을 설쳐야 했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오신 경우라면 트레킹 일정은 조정할 수 있다면 뒤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

일정상 발로 경험해보지 못하는 나바호 트레일의 선셋 포인트 복귀 구간. 아쉽지만 사진으로 남긴다.

이제 적벽이 치솟은 월스트리트 구간으로 들어간다.

182미터의 고도차를 한방에 내려가야 하는 스위치백.

아래로 내려오니 또 다른 세상을 만난 듯하다. 성배를 찾아 떠난 인디아나 존스가 여기에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영화 찍으러 요르단 테트라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미국 국립공원에서는 영화 촬영을 할 수가 없다. 허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 데스밸리에서 촬영하고 1977년 개봉한 스타워즈 에피소드 4는 1994년 데스밸리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 촬영한 것. 

햇빛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세월없이 위로 자라 끝내 빛을 본 소나무. 인고의 세월에 경의를 보낸다.

트레일 한복판에 널브러진 돌덩이조차 얼고 녹기를 반복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바위 위에 앉아 있다.

후두라고 불리는 조각상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일관된 것은 바람의 영향이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한쪽만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영국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 동상과 닮았다고 하여 이 동네 이름이 퀸즈가든. 어딜 봐서 여왕인지 알 길이 없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는지 잘 설명을 해놓았다. 여왕이 무슨 동물을 타고 있다고 하는데 상상력을 발휘해보라고 하는 걸 보니 용이라고 차마 입으로 말하기는 곤란했나 보다. 

여왕을 만난 이후부터 원형극장 내부는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 

갖가지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모습에 이내 상상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유타 시각 오후 4시 53분.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바위들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신통력을 부린다.

선라이즈 포인트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의 풍광 또한 감동이다. 붉은 적벽 사이에 띠를 지어 늘어선 흰색 사암은 한 낮임에도 브라이스 캐년에 불을 밝힌다.


아래쪽에서 보면 이 곳의 길은 복잡한 미로 같다. 그래서 서부 개척시대에는 ‘소 잃어버리기 딱 좋은 곳(Helluva Place to Lose a Cow)’으로 유명했다. 굳이 이 복잡한 협곡 안으로 소를 왜 몰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1870년대 애버니저 브라이스라는 농부가 브라이스 캐년 동쪽 지역 트로픽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 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브라이스가 이 일대에 길을 열심히 닦아 놓은 덕분에 그분의 노고를 기리는 차원에서 지금의 브라이스 캐년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 

지느러미처럼 넓게 펼쳐진 핀(Fin)에 구멍인 윈도우가 추가되었으니 윈도우 핀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 독특한 후두의 모습.

그 귀하다는 윈도우 핀도 이곳 브라이스 캐년에는 부지기수(不知其數)

해발 고도 2,750미터의 높이에서 바라본 일출은 여행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기에 충분하다.

낮엔 30도를 넘나들지만 새벽 일출 즈음 영하 2도의 기온은 한겨울의 영하 20도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해 뜰 무렵의 선라이즈 포인트

브라이스 캐년 시닉 드라이브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레인보우 포인트.

아무리 찾아도 왜 이곳이 레인보우 포인트인지 설명이 없다. 아마도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채의 지층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후두 가운데 구멍이 난 내추럴 브리지 포인트.  세월의 풍파에 다리 난간 오른쪽이 무너져 내렸다.


인스퍼레이션 포인트와 브라이스 포인트도 볼만한 곳이지만 20피트 초과 RV 차량은 진입 금지 구간이라 아쉽게도 살펴보지 못했다. 

할 말 많은 돌기둥들을 모아 놓은 듯. 그래서 이름도 요정의 나라 페어리 랜드.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모습의 돌기둥도 보이고

수도사의 모습도 보이고 손오공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중생들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곳에선 기독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공생하는 모습. 


그랜드 캐년이나 자이언의 야생의 와일드함과는 달리 아기자기함과 정교함으로 가득 채운 브라이스 캐년을 뒤로하며 다음 일정을 위해 길을 잡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04gI1sbhsls&feature=youtu.be

매거진의 이전글 천사가 내려온다는 그곳, 엔젤스 랜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