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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15.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2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2주간 일본 여행

사랑하는 아내에게,


오늘 하루는 잘 보냈나요?

당신이라면 벌써부터 쓸쓸해하고 있겠지요.

귀여움으로 마음을 토닥여 주는 한울이도 없고

수다 떨고 싶을 때 들어주는 남편도 없겠네요.

그래도 너무 쓸쓸해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맛있는 음식도 먹고

기분 좋은 공간도 다니고

혼자만을 위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길 바라요.

물론 논문 쓰느라 정신없겠지만요.


어젯밤 논문 얘기하는데 고민이 깊어 보였어요.

논문 쓰는 게 쉽지 않은 일인걸 알아요.

당신은 차근차근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그 뒤에는

어떤 결과를 마주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자고요.

눈앞의 상황에 조급해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리 인생은 앞으로 오래 지속될 테니까요.

아쉽게도 가 해줄 수 있는 건 응원밖에 없네요.

그런 만큼 변함없는 마음으로 응원해 줄게요.




오늘은 한울이와 도쿄 여행 둘째 날이에요.

가을 도쿄는 더할 나위 없이 날씨가 좋네요.

하늘은 유독 파랗고 햇빛도 아직 따스웠어요.

야외에 나온 것만으로 상쾌한 그런 날씨였어요.

아침 일찍부터 우에노공원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곤충 특별전을 보고,

공원 안에 호수에서 백조보트도 탔어요.

공원 콘서트장에서 열린 아이돌 공연도 봤고요.

적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활동을 한 것 같네요.


사실 이번 여행은 계획을 면밀히 짜지 못해서

뭘 할지, 뭘 먹을지, 어떻게 찾아갈지 고민하느라

중간중간 헤매거나 붕 뜨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아깝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반대로 시간을 꽉꽉 채워서

알차게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무슨 특별한 공간, 음식, 활동이 없어도

한울이와 있는 것만으로 충만해서 그런가 봐요.

식당 순서 기다리면서 캐치볼 놀이하고

할머니들이 참새 밥 먹이는 장면도 구경하고

처음 본 음료수에 대한 맛 평가도 해 보고

한울이와 시시콜콜한 농담도 하면서요.




어제 편지에는 세렌디피티!

우연한 만남이 가져다주는 기쁨

 느껴보겠다 했는데요.

이번 여행은  어디로 튈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도쿄 오기 전에 여행책 보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대충 찾아봤어요.

가고 싶은 곳들도 대략적으로 생각해 놨고요.

그런데 한울이가 이런저런 선호를 보이면서

벌써부터 제가 생각했던 활동반경을

급격히 넘어서고 있네요.

우연한 만남이 기쁨만 주는 건 아니라

당혹감도 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내일은 '도쿄스카이트리' 타워를 가보려 해요.

높이가 634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타워래요.

우에노공원을 거닐다 보니 도쿄스카이트리가

위치에 따라서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하더라고요.

나무에 가리거나 건물에 가려서 그런 건데

한울이는 타워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며

"신기루 아니야?"라며 재밌어하더라고요.

그림일기에도 이 얘기를 썼더라고요.

신기루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알다시피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건물에 올라가는 걸 죽기만큼 무서워해요.

당연히 도쿄스카이트리는 이번 여행에서

방문할 계획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한울이가 신기루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일기까지 썼으니

별 수 있나요. 같이 가봐야죠.

어쩜 주말인데도 예매표가 남아 있기도 하네요.

으~ 생각만 해도 벌써 오금이 저려오네요.

그래도 한울이와 단둘이 도쿄 여행을 온 만큼

한울이 시선으로 탐험을 같이 해주고 싶어요.




오전에 본 《곤충 MANIAC》 특별전은

유익했지만... 무척 힘들기도 했어요.

잠자리, 나비, 벌, 절지동물, 딱정벌레까지

5개 각 분야별 곤충 마니아들이 일본 전역에서

수집한 표본과 영상을 전시해 놓았더라고요.

기대하면서 한울이랑 같이 전시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입장하자마자 한울이가 돌변한 거 있죠?

자기는 이거 재미없어서 안 볼 거라면서

전시물을 발로 주먹으로 쿵쿵 치더라고요.

그러면 안 된다고 친절하게 주의를 주는데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할 말만 계속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짜증이 확 올라오더라고요.

이를 꽉 물고 겨우 참았답니다. 하하하.

어쩔 수 없이 한울이가 마음이 진정되도록

전시장 안에서 20분 넘게 안고 있었어요.

그냥 나갈까 했지만 재입장 안 되는 전시라

2,100엔(2만원) 입장료도 아깝고

무엇보다 제가 꼭 보고 싶어서 버텨봤어요.

다행히 한울이랑 10분만 딱 보는 걸로 약속하고

겨우 전시를 둘러볼 수 있었어요.


전시는 역시 재밌는 콘텐츠가 많더라고요.

특히 곤충 관찰 영상들이 재밌었어요.

한울이가 가장 좋아했던 영상은

거미가 거미줄에 묻은 물방울 털려고 

거미줄을 획획 돌리는 영상이었어요.

요즘 한울이가 줄만 보이면 휙휙 돌리는데

거미가 자기처럼 줄 돌린다며 신기해하더라고요.

다행히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많아서

우려했던 것보다 전시를 재밌게 봤어요.

오죽하면 한울이는 '저거 안 봤잖아!'라면서

본인이 더 구경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참... 한울이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싫다면서 난동을 피우더니

막상 들어와서는 나가기 싫다 생떼를 피웠요.

만약 처음에 싫다는 말 듣고 나가버렸으면

이렇게 유익한 전시는 못 봤을 것 같아요.

앞으로는 한울이 선호는 적당히 받아주려고요.




맞다. 한울이 선호를 다 받아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하나 더 있네요.

우에노공원 안에 콘서트장 앞을 지나가는데

아이돌 걸그룹이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요.

갑자기 한울이가 "아빠~ 이거 볼래!"라며

또 생떼를 피워서 결국 공연장에 들어갔어요.

입장권 3,200엔(3만원) 내고요...


들어가자마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은 오타쿠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게다가 앞자리에 앉은 50대로 보이는 아저씨는

키 190cm에 체격도 크고 무섭게 생겼는데,

아이돌 티셔츠 입고 노래 따라 부르며

"OO쨩 카와이~~~~"를 계속 외치더라고요.

앞에 아저씨뿐만 아니라 온 사방에서 그러니까

한울이도 약간 무섭고 놀랐나 봐요.

저도 이런 풍경은 티비나 영상으로만 봤었는데

실제로 그들을 보니까 열기가 대단하더라고요.

한울이 덕분에 일본 걸그룹 아이돌 공연도 보고

오타쿠 아저씨들의 열정도 느끼고 왔어요.

입장권이 가까웠지만 이건 미련 없이 나왔어요.

진짜 일본의 모습을 본 거라 후회는 없었어요.




요즘 한울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찍찍이 캐치볼인 것 같아요.

오늘도 하루종일 같이 붙어 있으면서

"아빠~ 우리 캐치볼 할까?"라는 말을

10번은 넘게 한 것 같거든요.

캐치볼도 하다 보니까 실력이 늘더라고요.

가까이서 공을 던지기 시작해서

한울이가 공을 잡을 때마다

한 발씩 멀리서 던지거나

점점 더 높이 던져주고 있어요.

공 잡기에 성공할 때마다

엄청나게 뿌듯한 표정을 짓는데

언제 그 모습은 직접 한 번 보면 좋겠네요.

눈빛으로 '아빠 봤지? 한울이 잘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요.

그 뿌듯해하는 표정이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저도 공을 점점 잘 던져주려고 해요.

본인도 잘하고 싶은지 요즘은 혼자 연습도 해요.

공을 높이 던졌다가 잡아보고 하면서요.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한울이 모습일 텐데...

저 혼자만 점유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얼른 논문 끝내고 우리 같이 놀아요.




우에노 다음으로 이동할 지역도 정했어요.

도쿄 서쪽에 위치한 기치조라는 동네예요.

도쿄 현지인들이 살고 싶은 동네로 유명하대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한번 가보려고요.

조금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이길 바라고 있어요.

우에노는 북적북적 시끌시끌 번화가 느낌이라

도시 구경하는 맛 아직 못 느꼈거든요.

아! 우에노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네요.

도시 한가운데로 지상철이 다니는데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봤던

도쿄의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주인공인 한울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저 혼자서 설렘을 느꼈던 소소한 순간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면

한울이가 아프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밥도 잘 먹고 컨디션도 좋은데

열이 조금씩 오르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낮에 재보면 37.3~37.5도 정도 되더라고요.

돌아가는 날까지 별일 없으면 좋겠네요.


한울이랑 남편은 잘 지내고 있어요.

또 소식 전할게요.

논문 쓰느라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요!

내일도 힘내요!


사랑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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