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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16.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3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보고 싶은 아내에게,


오늘 하루도 잘 보냈나요?

걱정스러운 소식부터 전해서 미안해요.

저랑 한울이는 아무래도 아픈 것 같아요.

둘 다 어제보다 열이 올랐네요.

한울이는 체온이 38.5도가 넘어가서

결국 해열제를 먹이기 시작했어요.

저도 체온이 37.5도에서 왔다 갔다 하네요.

다행히 둘 다 컨디션이 나쁘진 않아요.

한울이는 여전히 활기가 넘쳐요.

아침부터 얼른 밖에 나가자고 절 재촉하네요.

저는 몸살 기운이 조금 느껴지는데

아직까지 아파서 쉬어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타지에서 한울 이를 돌봐야 한다는 긴장감에

아픔을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한울이를 데리고 겁 없이 둘만 여행을 왔는데

사실 하루하루 상황이 녹록지 않았어요.

게다가 한울이가 아프니까지 하니까

제 마음의 부담도 점점 커져가네요.

한국에서 한울이가 아팠을 때는

한울이 돌보는 건 늘 당신 몫이었었죠.

밤새 열보초 서고 해열제 먹이고 물로 몸 닦이고

그 와중에 온갖 한울이 짜증을 다 받아주면서요.

반면에 저는 옆에서 아무런 도움도 안 주면서

'그냥 두면 괜찮아진다'라는 말을 하곤 했었어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아픈 한울이를 보살펴 보니

당신 마음을 이제야 공감하게 되었어요.

제가 얼마나 무심했었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그동안 한울이를 위해 희생해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했어요.


남은 여행을 무사히 마치도록 응원해 주세요.

제가 용기를 내려면 당신의 응원이 필요해요.

그 응원을 붙잡고 이 상황도 잘 이겨내 볼게요!

제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에요.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의 헌신과 응원이 와닿지 않았을 텐데요.

저는 언제나 당신 응원이 절실한 사람이네요.

덕분에 항상 당신은 내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래도 걱정과는 달리 한울이와 저는

오늘도 도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계획한 대로 '도쿄스카이트리' 도 다녀왔어요.

높은 곳 싫어해서 남산 전망대도 안 가봤는데...

한울이 덕분에 오금이 저린 구경도 했네요.

근처에 사찰 등 둘러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호텔로 일찍 들어와서 목욕하고 쉬었어요.

한울이가 식당에서 밥 먹으면 힘들다고 해서

저녁은 도시락 사 와서 호텔 방에서 먹었어요.

그랬더니 한울이도 편하게 밥을 먹더라고요.

한울이는 해열제 먹고 잠이 들었어요.

밤새 열이 오르는지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도쿄스카이트리 다녀온 후기를 더 들려줄게요.

끔찍한 악몽 같은 시간일 줄 알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도쿄스카이트리는 높이가 634m예요.

전망대 높이만도 450m였어요.

지난번 여의도에서 같이 탔던 서울달이

높이 100m까지 올라갔었잖아요.

그때도 무서워서 아찔아찔했었는데

450m 높이는 상상도 안 되더라고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했는데

대기줄에서 한울이가 잠들어 버렸어요.

긴장된 마음으로 450m 전망대로 올라갔는데...

오금이 저려서 정말 한 발도 못 떼겠더라고요.

오죽하면 전망대 밖이 안 보이는 구석에서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니까요.

밖을 쳐다볼 생각은 당연히 못했고요.

한울이라도 깨어 있었으면 용기를 냈겠지만

무서워서 한울이 깰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어요.

유모차에 잠든 한울이 손을 붙잡고요.


30분 정도 지난 후에야 한울이가 깼어요.

다행히 한울이는 무서워하지 않더라고요.

전망대 창가로 붙어서 경치를 즐기더라고요.

"아빠~ 저 산 이름은 뭐야?"

"아빠~ 저기 봐바! 운동장이 보여!"

"아빠~ 저기 헬리콥터 날아간다!"

계속 저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뭐라도 반응을 하려면 저도 같이 보면서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데 

유리창 밖으로 다가서기조차 어려우니...

한울이한테 아빠 무섭다고 손 잡아달라고 하니

"나는 하나도 안 무서운데~ 메롱메롱~"하고

웃긴 표정 짓고 놀리면서 도망가더라고요.

그때 생각할수록 서럽고 화가 나네요.

이렇게 아들 데리고 여행 데려오면 뭐 하나요.

높은 데 무서워한다고 놀림이나 당하고.

당신이었으면 내 손을 잡아 줬을 텐데...


그래도 한울이랑 같이 있다 보니까 

서서히 높은 위치에도 적응이 되더라고요.

전망대에서 3시간을 넘게 있었어요.

생각보다 오래 있었어요.

저도 뒤늦게야 전망대 창가로 다가서서

도쿄 시내 전경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어요.

높은 곳은 마냥 무섭고 싫어하기만 했는데

그 위치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도 있었어요.

사람이 사는 도시에 사람이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리고 땅 밑보다 구름이 더 가까워 보였어요.


땅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주인인 땅에서

개인의 존재감이 없어진다는 게 생소했어요.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대상에 따라서

렌즈 배율을 맞춰서 봐야 하잖아요.

과연 저는 어떤 배율에 맞춰서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자신, 가족, 지인, 인간, 사회, 세계, 자연 등

그중 저는 늘 제 자신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공감 능력이 낮은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요.

그래도 당신과 한울이를 만난 덕분에 

제가 관심 가지고 이해하는 대상이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느껴요.

아직까지 저는 하늘 위에 떠 있기보다는

땅에 발 붙이고 있어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한울이도 전망대 방문을 만족스러워했어요.

엄마하고 친구들한테 자랑해야겠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증 사진을 찍더라고요.

게다가 도쿄스카이트리가 얼마나 높은지

나름대로 감을 잡아보려고 했는지

부르즈할리파부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63빌딩, 롯데타워, 도쿄타워 등등

책에서 본 높은 건물들 이름을 줄줄 대면서

"이 건물보다 더 높아?"라는 

질문을 계속 묻더라고요.

책으로 100번 외운 높은 건물 지식보다는

직접 와서 한 번씩 경험하는 편이

한울이의 지식 체계 형성에도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아참 한울이의 오늘 그림일기에

도쿄스카이타워 전망대가 등장했어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여행은 성공이에요.




요즘 한울이와 하루 2~3번씩 목욕을 해요.

집에서는 한울이 목욕시키려면

거의 애원하다시피 부탁해야 했잖아요?

그런데 일본 여행 와서는

"아빠 우리 목욕하자!"라면서

먼저 목욕하고 싶다고 한다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서도 목욕하자고 하고.

낮에 쉬러 왔을 때도, 밤에 자기 전에도

틈만 나면 제게 목욕하자고 조르네요.


이제 자기도 혼자 씻을 줄 안다며

비누칠도 하고 샤워도 혼자 해요.

게다가 오늘은 아빠도 씻겨주겠다면서

조그마한 손에 샴푸랑 비누 묻혀서

제 머리도 감겨주고 몸에 비누칠도 해줬어요.

저는 원래 한울이와 목욕하는 걸 좋아해서

이런 상황이 싫지만은 않아요.

이제 한울이도 5살이나 되어서

당신과는 목욕할 일이 거의 없겠네요.

한울이와 목욕하면서 느끼는 

이 기쁨과 행복을 당신에게 

전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당신이 모유수유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울이와 애틋해진 것 같아 늘 부러웠어요.

이제 제가 한울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내일은 기치조지라는 동네로 이동해요.

우에노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거리예요.

거기서 내일부터 4일을 머무를 예정이에요.

지브리미술관이 있는 동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한 곳인데요.

여행 책자를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정보가 많지는 않더라고요.

관광에 특화된 지역은 아닌가 봐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여행은 좋아하지만 

사람 많은 관광지에 가는 건 싫거든요.

기치조지가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요.

어떤 곳이든 힌울이와 둘이 있는 한

즐거운 추억을 쌓을 것이라 확신해요.

여행의 참된 소득은 방문한 장소보다는

누구와 어떤 감정을 만들어 냈고

어떤 새로운 감각을 발견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으니까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한울이 해열제 먹이고 재웠더니

다행히 열은 좀 떨어졌어요.

잠도 잘 자고 있고요.

새벽에도 괜찮으면 좋겠네요.

중간중간 열 확인 좀 해볼게요.

당신도 오늘 고생 많았어요.

논문 작업하면서 힘내라고 

사진도 같이 보낼게요!


그럼 안녕!

언제나 당신이 고마운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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