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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18.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4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보고 싶은 아내에게


오늘 하루는 어떻게 지냈나요?

어제 편지에서 한울이가 아프다고 소식을 듣고

당신이 많이 걱정했을 것 같아요.

고맙게도 아직까지 한울이가 잘 버텨주네요.

오늘도 하루종일 열은 오르락내리락했어요.

특히 새벽에는 한울이가 열이 많이 올랐었어요.

자면서 으슬으슬 떨고 잠꼬대도 하더라고요.

체온을 재보니 38.7도나 되었어요.

다행히 해열제를 먹이니 열이 좀 떨어졌고요.

38도 아래로 내려간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저도 겨우 잠들 수 있었어요.

여기서 더 심해지면 병원에 가보려고 해요.

별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저랑 한울이는 기치조지로 무사히 이동했어요.

별다른 정보도 없이 무작정 방문한 동네지만,

머물 동안 이 동네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높은 건물도 많지 않고 깔끔한 분위기예요.

고급스러운 주택 많아 보이고요.

<짱구는 못 말려>에서 본 동네 느낌이었어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주 봐서 그런지

일본을 여행하면서 자꾸 애니메이션에서 본

장면들을 마주치게 되기를 기대하게 되네요.

문화콘텐츠의 영향력을 새삼 느꼈답니다.


기치조지에 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이노카시라 공원>이었어요.

공원 안에 동물원, 사찰, 호수, 미술관까지

가볼 만한 장소들이 꽤 있네요. 상당히 넓고요.

이번 일본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지브리박물관>도 이 공원 안에 있어요.

체크인 전에 공원에 잠깐 들러보려고 갔다가

아예 돗자리 깔고 한참을 한울이와 놀았어요.

가을 나뭇잎도 구경하고, 치볼도 하면서요.

그런데 뭐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서 자연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오늘은 휴일이라 공원에 사람들이 많았어요.

덕분에 여기저기서 버스킹 공연도 열리면서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나더라고요.

저희가 돗자리 펴고 놀던 자리 근처에서도

바이올린 연주자가 버스킹을 했었어요.

덕분에 클래식 음악도 감상했답니다.

초록초록 나뭇잎 사이로 바이올린 선율이

바람에 실려 두둥실 하늘로 울려 퍼지더라고요.

연주자의 실력이 수준급이라 놀랐어요.

공원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쉽게도

호텔 체크인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곳에 3일을 더 머무를 예정이니까요.

몇 번은 더 와보려고 해요.




호텔로 돌아와서는 한울이와 같이 낮잠을 잤어요.

한울이가 먼저 낮잠 자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몸에 열이 나니 좀 쉬고 싶었나 봐요.

한울이가 본인 컨디션에 따라서

필요한 걸 말해주는 게 오히려 고마웠어요.

같이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워서 한울이 팔베개를 해줬어요.

한울이는 제 품에 파고 들어서 안기더라고요.

그리고 제 얼굴과 눈을 지긋하게 바라봤어요.

저도 그런 한울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어요.

한울이는 눈꺼풀을 꿈뻑꿈뻑하더니

스르르르 눈이 감기면서 금세 잠이 들더라고요.

귀...귀여웠어요... 하악....

이런 귀여운 맛에 육아하죠.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새벽부터 한울이 아프지 않도록 보살피고

여행짐 바리바리 싸들고 이동하고 하면서

저도 오늘은 좀 지치고 피곤했었나 봐요.

그렇게 저도 한울이와 같이 좀 쉬었네요.


저녁은 도시락을 사 와서 호텔에서 먹었어요.

한울이가 식당에서 먹긴 싫다고 하더라고요.

몸이 아프니 식당에 가는 것도 불편했나 봐요.

마음대로 장난치지도 못하게 하고

누워 있거나 아빠한테 안기지도 못하니까요.

그래서 한울이와 산책할 겸 호텔 주변을 돌며

괜찮아 보이는 도시락들을 둘러봤어요.

연어 삼각김밥, 매실장아찌 삼각김밥,

그리고 각종 튀김과 꼬치들을 샀네요.

한울이가 자기 튀김 먹겠다며 잔뜩 샀는데

밥만 먹고 결국 고기와 튀김은 입도 안 댔어요.

고기를 좀 많이 먹고 힘내면 좋겠는데...

그나마 밥이라도 잘 먹어서 다행이긴 해요.

한울이는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다는데

주변에 국밥집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녁 먹고 나서는 호텔에서 놀았어요.

또봇 영상도 같이 봤답니다. 호호호.

한울이가 처음 보는 영상 콘텐츠이라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한울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다 보면

깊은 공감대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근데 보다 보니까 저도 재밌더라고요.

한울이하고 하루에 1편씩만 보기로 했는데

제가 먼저 다음 편을 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또봇은 탈것들이 로봇으로 변신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예요.

원래 우주에서 전쟁을 하던 로봇들인데

무슨 사연인지 지구까지 피신을 왔고

모두 기억을 잃은 상태이더라고요.

지금까지 등장한 로봇은 3개예요.

스피드, 몬스터, 로켓이라고...

저 로봇들 장난감들 있으면

저도 갖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어렸을 때부터 애니 피규어 모으고 싶었는데

돈 모으고 바쁘게 사느라 미처 잊고 있었네요.

나중에 한울이와 덕질을 같이 해도 좋겠어요.

물론 이건 당신 허락이 필요할 것 같지만요.



당신에게 고백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제가 한울이한테 잘못한 일에 대해서요.

오늘 한울이 재우면서 순간 욱! 한 나머지

한울이 뒤통수를 때렸어요.

한울이가 자기 전에 당신이랑 통화할 때

저는 옆에서 기다리다 먼저 잠들었었어요.

둘이 통화가 길어지니까 짜증이 난 나머지

한울이한테 휴대폰을 빼앗아 통화를 끊었어요.

한울이는 속상했는지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 주먹에 제 얼굴이 맞았었어요.

그때 순간 욱해서 저도 한울이를 때렸네요.

"아빠 안 그래도 몸살 나서 힘든데!!!"

"왜 말을 안 듣고 그래!!"라고 소리치면서요.

그러고 나서 몇 초간 정적이 흘렀어요.

한울이도 아빠가 때려서 놀란 것 같고

저도 한울이를 때렸다는 충격 때문에요.

한울이는 울음을 참아보려고 했었는데

마음속 깊은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나 봐요.

그제야 저도 정신이 들어서

한울이를 껴안고 사과를 했어요.

"아빠가 화내고 때리면 안 되는데..."

"너무 미안해..."

"아빠보다 한울이 네가 더 아프고 힘들 텐데..."

한울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더라고요.


겨우 진정시키고 침대에 누웠는데

평소와 달리 한울이가 말이 없었어요.

평소에는 잠들 때까지 쫑알쫑알 말을 건네고

제 얼굴을 만지며 장난치고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건 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한울이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면서

"아빠 용서해 줄 수 있어?"라고 물었더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라고요.

그 후로 잠들 때까지 한울이도 저도

한마디 말없이 누워만 있었어요.

한울이는 어땠을지 몰라도

저는 그 고요함이 너무 무섭더라고요.

마치 당장 한울이가 절 떠날 것 같아서요.


좋은 아빠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이렇게 둘이 여행을 떠나 온 건데...

순간의 잘못으로 한울이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밤새 잠이 안 오더라고요.

육아하면서 항상 염두에 뒀던 생각이

'잘해주기보다는 상처 주지 말자'였어요.

오늘은 그 원칙이 무참히 깨진 날이에요.

제 자신한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아마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당신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을지도 몰라요.

좋은 아빠 되기가 참 힘드네요.

그동안 당신은 어떻게 한울이를 키웠나요?

한울이를 제게 맡겨 준 당신에게도 미안해요.

제가 하지 말았어야 할 잘못을 했어요.


저도 점점 지쳐가나 봐요.

이제 겨우 여행 4일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저도 몸살이 나고 열이 나는 상황에서

아픈 한울이 보살피랴, 여행지 찾아보랴

그 부담감과 긴장감이 상당하네요.

앞으로 한울이와 여행이 10일 더 남았는데

한울이와 즐겁게 잘 보낼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울이가 평소처럼

아빠를 반가워해 줄까요?

한울이에게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요?

오늘따라 당신이 더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저도 아빠이니까

지금 상황을 현명하게 풀어가 볼게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한울이가 아프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저에게도 어떤 상황도 헤쳐나갈

용기와 마음의 여유를 보내주세요.


그럼 이만,

항상 당신을 의지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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