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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14.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1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2주간 일본 여행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저는 한울이랑 도쿄에 잘 도착했어요.

숙소에 짐도 풀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왔어요.

한울이는 피곤한지 벌써 잠들었네요.

한울이 데리고 돌아다닐 때에는

저도 정신없고 긴장되어서 몰랐는데

방에 혼자 깨어 있으니까

당신이 벌써 보고 싶어 졌어요.

우리 둘이 여행 다닐 때 생각나더라고요.

한울이 태어나기 전에는

7년 동안 둘이 꼭 붙어 있었잖아요.

내 옆은 항상 당신을 위한 자리였는데

이번 여행만큼은 한울이가 차지해 버렸네요.


근데 한울이 좀 대견하더라고요.

도쿄 오는 동안 잘 버텨줬어요.

아침부터 공항버스에 비행기에 기차에

이동시간이 많아서 지루하고 힘들었을 텐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잘 있어줬거든요.

장난치고 싶어 하다가도 말을 잘 따라줬고요.

오늘 하루 같이 지내보니까

남은 2주도 한울이와 잘 지낼 것 같아요.


한울이도 여행온 게 기분 좋은가 봐요.

비행기 타서 구름 아래로 무지개도 보고

도쿄 명물 닭꼬치도 먹어 보고

하루종일 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아참. 한울이 잠들기 전에 그림일기도 썼어요.

"인천공항에서 나리타공항에 왔어요."

"닭꼬치도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내일은 어디 갈까?"라고요.

얘도 이번 여행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엄마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아했겠지만요.

한울이도 엄마 내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가방에 달아 준 가족사진을

한울이가 수시로 꺼내보더라고요.

저는 그럴 생각까지는 못 했는데

한울이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려줘서 고마워요.


당신한테 박사 논문 준비할 시간 준다고

이번에는 한울이만 데리고 여행 왔지만

당신 졸업하면 우리 다 같이 여행 가요.

프랑스 파리가 좋겠네요!

대학생 때 가보고 싶던 곳이라고 했지요?

작년에 출장으로 다녀왔는데 좋더라고요.

다시 한번 가고 싶었는데

당신 졸업 여행이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2주간 혼자 있어야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요!

한울이랑 함께 응원해 줄게요!




오늘 한울이랑 지내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저 혼자 힘들 뻔했던 순간은 있었어요.

한울이랑 둘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출발하고 30분 정도 지나니까 심심했나 봐요.

의자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고

저한테 눕고 매달리고 슈퍼맨 자세 하고

난동을 피우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어요.

아직 도쿄까지는 1시간 30분을 더 가야 하는데

얘를 어떻게 안정시켜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혹시 몰라 또봇 영상을 휴대폰에 담아왔는데

아직 영상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었어요.

한 번 보여주기 시작하면

비행시간 내내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요.


결국 한울이 심심하지 않게 몸과 말로 때웠어요.

끝말잇기, 가위바위보, 구름모양 맞추기,

색종이 접기, 이상한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등

두뇌를 풀가동해서 한울이가 관심 가질만한

주제로 놀이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어요.

다행히 더 이상 한울이가 말썽 피우지 않고

비행기 도착할 때까지 잘 있어주더라고요.

저한테는 지치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휴우...

원래는 비행기 타고 가면서

한울이와 여행계획 좀 짜보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계획 얘기는 하나도 못한 거 있지요?

그래도 영상 보여주지 않고 잘 도착했어요.

제 육아스킬이 점점 발전하는 것 같아서

그건 내심 뿌듯하더라고요.


저녁은 숙소 근처 이자카야에서 먹었어요.

닭꼬치 포함해서 여러 개 음식을 시켰지요.

닭꼬치는 같이 나눠먹으려고 4개를 시켰는데

한울이가 4개를 혼자 먹더라요.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해요.

맥주랑 같이 저도 한 꼬치 먹으려고 했는데

한울이가 잘 먹으니까 다 주고 싶어 지더라고요.

아빠 믿고 여행 따라와 준 게 고마웠거든요.

결국 그림일기에 닭꼬치 먹은 것도 적었어요.

그만큼 만족스럽고 인상적이었나 봐요.


저녁 먹으면서 기분 좋은 순간도 있었어요.

제가 맥주 마시려는데 한울이가 자기 컵 들더니

"건배할까?" 이러더라고요.

짠~ 하고 건배하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어요.

마치 되게 친한 술친구 한 명 생긴 것 같아서요.

평소에는 술을 잘 안 마시지만

한울이랑 여행 가서는 이렇게 술 한 잔씩 하면

이젠 나름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고

부쩍 친해진 기분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한울이하고 술 한 잔 마실 날도 오겠네요.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얘기를 나눌지 무척 기대가 되어요.




아직 여행 계획을 세우진 못했는데

처음 3일 동안은 '우에노'에 머물 예정이에요.

근처에 넓은 우에노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과학관, 미술관, 동물원, 박물관이 있더라고요.

한국의 과천 같은 분위기가 생각났었어요.

저랑 한울이가 좋아하는 시설들이 모두 있고

공항이랑도 가까워서 괜찮겠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디에 어떤 명소들이 있는지는 확인했으니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움직여 보려고요.

여행을 다니는 순간만큼은

'세렌디피디(Serendipity)!'

우연이 이끄는 곳에서 만난 기쁨과 행운이

다가올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서요.

이후 일정도 정해지면 알려줄게요.


아침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에 부담이 컸는데

막상 한울이와 와 보니 여행할만한 것 같아요.

한울이도 나도 감기 기운이 조금 있는데

심해지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뭐 무리하지 않으면 괜찮겠지요.


그럼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당신이 벌써 보고 싶네요.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치도록 기도해 주세요.


항상 당신의 꿈을 응원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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