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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08. 2024

가을을 모았어요

나무열매 수집 놀이

여름이 지나가서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어느 날, 아내는 다이소에 들러서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 사 왔다. 플라스틱 상자는 넓적한 모양이었고 투명해서 상자 안이 들여다 보였다. 상자 안에는 칸막이가 있어서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아내한테 묻진 않았다. 아내는 원래 이것 저거 쓸데없는 걸 잘 사 오는 사람이니까.


그 뒤로 아내와 한울이가 밖에 같이 나갔다 올 때마다 나무 열매 같은 것들을 주어왔다. 도토리, 밤, 솔방울 같이 친숙한 열매부터 시작해서 이름은 모르지만 자주 봤던 열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열매까지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한울이는 옛날부터 자연 관찰 놀이를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풀, 꽃, 나뭇잎, 열매, 곤충 등 자연물을 집으로 가져와서 관찰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 보니 아내가 사 온 플라스틱 상자 안 구획마다 나무 열매들이 종류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류는 달랐지만 흐벅진 모양을 보니 아내와 한울이가 고심해서 고른 상태 좋은 열매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색깔도 알록달록 해서 가을에 볼 수 있는 색깔을 담아 놓은 느낌이었다. 상자를 보며 아내한테 "이거 뭐야? 왜 이렇게 예뻐?"라고 물었다. 아내는 "아~ 이거? 한울이의 가을 상자야. 한울이랑 밖에 나갈 때마다 가을 나무 열매들 떨어져 있는 거 주어 왔거든. 한번 모아 보려고."라고 답했다. 박물관에서 곤충들 박제해 놓은 건 봤어도, 가을 나무 열매를 모은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 흥미진진한 놀이를 하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섭섭했다. 물론 내가 하도 바쁜 척을 하니까 아내는 굳이 알려주지 않은 같다.


다행히 한울이의 가을 상자에는 아직 공간이  있었다. 나도 한울이와 가을 열매 수집 놀이를 같이 하고 싶었다. 아빠가 같이 한다니 한울이도 기뻐했다. 새로운 열매는 어디에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아내가 공부하는 학교 캠퍼스가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교 캠퍼스에는 나무마다 이름표도 붙어 있고, 또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서 열매도 많이 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내는 자기도 학교에서 나무 열매 많이 봤다며 "거기가 좋겠다!"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지난 주말에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한울이 와 함께 아내 학교 캠퍼스로 향했다.


날씨 좋은 날 채집망 들고 가을 열매 수집하러 출발ㅣⓒ녹차라떼샷추가


한울이와 나는 둘이 역할을 나눴다. 나는 높게 멀리 보면서 열매가 열릴 만한 나무를 찾고, 한울이는 자기 키 높이에서 나무 주변에 떨어진 열매를 찾기로 했다. 작은 곤충채집망도 가져왔다. 그건 혹여나 한울이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진 열매를 줍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나무 열매가 잘 보이지 않자 둘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내가 "한울아~ 여기는 열매 맺는 나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더 위로 올라가 볼까?"라고 제안하면, 한울이는 "아니야. 물이 흐르는 곳에 열매 맺는 나무가 있을 것 같아. 여기 물 어디 있어?"라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한울이 말에 따라서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열찾아보기를 반복했다.


한울이는 열매 찾기에 열심히였지만, 사실 나는 열매를 못 찾아도 괜찮았다. 그저 한울이와 그렇게 함께 같은 놀이를 하는 시간 그 자체로 좋았으니까. 게다가 가을이라 하늘도 맑고 날씨도 선선해서 수풀이 우거진 캠퍼스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느끼며 걷다가도 한울이가 "아빠! 여기야! 열매가 있어!"라고 외치면 다시 열매 찾기 놀이에 집중했다.


학교 캠퍼스에서 처음 만난 열매는 "벚잎꽃사과나무" 열매였다. 한울이 말대로 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서 발견한 열매였다. 예쁜 이름을 가진 나무라서 한 번 반가웠고, 동글동글 꽃사과 모양이 귀여워서 또 한 번 반가웠다. 우리가 발견한 꽃사과열매는 지름 3-4cm 정도 크기의 아담한 초록과 갈색이 물감처럼 섞인 색깔의 열매였다. 경사진 곳에 이제 갓 떨어진듯한 탱탱한 열매가 있어서 한울이가 가져온 채집망으로 열매를 주었다. 처음 보는 열매를 눈으로 관찰하고, 꾹 한번 눌러도 보고, 향기도 맡으며 요리조리 살폈다. 한울이는 열매가 마음에 들었는지 벚잎꽃사과나무 앞에서 "오예~ 오예~" 흥얼거리며 춤을 췄다. 이럴 때에는 주변 눈치 상관없이 같이 신나게 춤을 춰야지. 덩달아 나도 "오예~ 오예~" 따라 하며 골반을 흔들었다.



두 번째로 만난 열매는 "박태기나무" 열매였다. 벚잎꽃사과나무를 발견한 길을 따라서 주욱 올라가다 보니 얼마 안 가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박태기나무는 콩과 식물이다. 처음 보는 나무와 열매이지만 강낭콩과 모양은 비슷해 보였다. 그렇지만 색깔은 짙은 갈색에다가 말라비틀어진 건 확실히 달랐다. 박태기나무 열매는 흡사 떨어지기 직전의 단풍잎 같았다. 줄기에서 물을 공급받은 지 오래되었는지 아직 줄기에 매달려 있는 열매를 만져보니 바삭바삭했다. 단단하기도 해서 날카로운 칼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박태기나무가 자란 땅 위에는 박태기나무 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내가 열매를 주으려고 하자 한울이는 "내가 주을게!"라고 말하며 자기 마음에 드는 열매들을 골라 내 손에 건네줬다.  



마지막으로 만난 열매는 "일본목련" 열매였다. 앞서 2개 열매 주운 것을 가을 상자에 넣으려고 벤치를 앉았는데, 족히 20m는 넘을 것 같이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저 나무에도 열매가 있을까?"라고 말하며 같이 살펴보는데 한울이가 "어!! 있다!!! 저기 위에!!!"라며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무성하게 우거진 초록색 넓은 나뭇잎 사이로 빨간색 열매가 보였다. 20m 위를 올라갈 수는 없으니 떨어진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울이와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떨어진 열매는 있었으나 대부분 썩어가고 있어서 가을 상자에 담기에는 어려웠다. 다행히 주변에 일본목련이 몇 그루가 더 있어서 한 그루씩 밑동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정말 딱 하나 상태가 말끔한 열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가 큰 만큼 열매도 컸다. 커다란 일본목련 열매에서는 이제 갓 딴 과일에서 맡을 수 있는 생생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이제 남은 일은 한울이의 가을 상자 안에 열매를 잘 넣어두는 일이었다. 벚잎꽃사과나무 열매, 박태기나무 열매 그리고 일본목련 열매까지.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을 열매들을 하나씩 고르고 닦고 말려서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어느덧 한울이의 가을 상자는 열매들로 꽉 차게 되었다. 알록달록한 열매들만큼이나 내 마음도 벅차고 뿌듯했다. 나야 오늘 열매 3개를 모으는 걸 함께했을 뿐이지만, 처음부터 모아 온 한울이 마음은 나보다 더하면 더 뿌듯했을 것이다. 열매를 정리해서 넣어두고 아내한테 오늘의 성과를 사진으로 보냈다. 아내는 열매들마다 이름 붙여서 한울이 어린이집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같이 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울이도 친구들하고 같이 관찰하고 싶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한울이의 가을 상자를 완성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여 앉았다. 우선 열매 이름부터 찾아야 했다. 아내와 한울이가 그동안 이것저것 열매를 주어오긴 했는데 어떤 열매인지 이름을 모르는 종류들도 여럿 있었다. 오늘 찾은 열매들은 다행히 나무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공원이나 길가에서 만난 열매들은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노트북을 켜놓고 검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을 나무 열매' '주황색에 동그랗고 조그마한 나무 열매'처럼 계절과 열매 형태에 관한 설명을 바꿔가면 하나씩 찾아야 했다. 보다 보면 이게 저것 같고, 저게 이것 같고. 다 같이 헛갈렸다. 주운 열매와 인터넷 사진을 비교해 보며 정확한 이름을 발견하면 다 같이 흥분하고, 또 다음 열매 이름을 찾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열매 이름을 다 찾고 라벨지로 프린트를 해서 주면, 한울이가 하나씩 이름을 붙여 놓았다. 칠엽수, 고욤나무, 피라칸다, 신갈나무, 꽃사과나무, 마가목, 졸참나무, 쥐똥나무 한울이가 모은 16 종류의 가을 열매들이 자기 이름표를 가지고 자리에 모였다.



다음 날 어린이집 등원할 때 한울이의 가을 상자를 가져갔다. 선생님은 한울이가 가져온 상자를 보고 "이건 뭐야?"라고 물었다. 한울이는 "가을 열매를 모았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보려고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일과 시간에 같이 보자며 상자를 교구함에 넣어 두셨다. 나중에 선생님한테 따로 연락이 왔다. "이거 열매 어떻게 모으셨어요?"라며. 안 그래도 요즘 어린이집 친구들이 열매에 관심이 많은데 이렇게 해볼 생각은 못했다며 놀라워하셨다. 어린이집 다녀온 한울이에게 "가을 상자 친구들이 좋아했어?"라고 물었더니, 다행히 친구들도 관심을 가지고 좋아했다고 했다. 며칠 더 어린이집에 놔두고 같이 볼 예정이라고 했다.


한울이의 가을 상자. 한울이의 관심과 아내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우리 집 작은 프로젝트. 완성되고 나니 뿌듯했다. 늦게나마 한울이가 관심 있어하는 놀이에 참여할 수 있어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가을을 기념할 수 있어서, 그리고 한울이가 주변 친구들에게 자기의 이야깃거리를 들려줄 수 있어서 말이다. 한울이는 포켓몬, 티니핑, 또봇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은 몰라도, 가을에 만날 수 있는 열매 이름에는 친숙한 아이로 자라가고 있다.


한울이가 높은 자연 감수성을 가진 아이로 자라도 좋겠다. 자연은 상상력과 콘텐츠의 보고이기도 하니까. 대전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의 자연사실에는 이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적혀 있다. "자연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아라, 그러면 너는 모든 것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또한 《너의 이름은》으로 유명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특히 빛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어떻게 그렇게 빛에 대한 묘사를 잘하는지?"라고 물었는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렸을 때 할 일이 없어서 집 근처 산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했다."라고 답을 하기도 했다.


한울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든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엄마아빠도 함께 그 과정을 즐거워할 것이고 한울이가 가는 길을 응원해 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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