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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시간을 낭비하는 리더 (9편)

현실은 무시한 채 무리한 요구를 하는 리더

by 녹차라떼샷추가

현실은 무시한 채
무리한 요구를 하는 리더


"이번 달 안에 무조건 끝내세요"


신제품 출시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였어요. 실무자들은 출시까지 최소 3개월은 필요하다고 보고를 했지만, 담당 리더는 고개를 젓더니 "한 달 안에 끝내세요"라고 지시했어요. 실무자들은 강하게 반대했죠. 성능 평가, 품질 안정화, 사용자 매뉴얼 작성, 생산 지시서 마련 등 필요한 과정들을 설명하며, 그 일정은 불가능하다고 호소했어요. 하지만 담당 리더는 실무진의 설명을 모두 묵살하며 말했어요. "현실은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방법을 찾는 건 당신들 몫입니다."


회의가 끝나고 실무진들은 할 말을 잃었어요. "현실도 모르면서 헛소리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죠. 이어진 논의에서는 여러 대응 방안이 오갔어요. 일정 맞추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설득하자는 의견, 결과가 어떻든 중간 과정 건너뛰고 일단 일정만 맞추자는 의견, 혹시 될지도 모르니 일단 해보자는 도전적 제안까지 나왔어요. 담당 리더가 실무자들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결국 결론은 하나로 모이게 되었어요. "위에서 시키는데 어쩔 수 있나... 되는 데까지 해 봐야지..."


신제품 출시 결과는 참담했어요. 앞당긴 출시 일정에 맞춰 고객사에 대량 납품을 했지만, 여러 제품에서 불량이 발생했어요. 실무진들은 최종 일정을 맞추려고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품질 안정화와 출하 검수 단계를 거의 생략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어요. 내부 검사에선 문제가 없었지만, 현장에서 대량 문제가 드러난 것이죠. 이 사건으로 고객은 계약 취소를 요구했고, 회사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했어요. 문제가 된 제품을 전량 교환하고, 계약 조건을 수정하고, 개발자를 파견해 장기간 현장 대응을 한 끝에야 겨우 계약을 지킬 수 있었어요. 신제품을 두 달 먼저 출시하겠다는 리더의 판단을 수습하는 데에만 6개월이 더 걸렸고요.




무리한 요구는

조직 비효율의 원인


위 사례처럼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리더를 현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어요. 제 경험 상 그런 리더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착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첫째, 직원들을 무리하게 밀어붙여야 혁신이 생긴다. 둘째, 현실을 고려하면 높은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셋째, 직원들은 평소에 게으르다. 이런 인식을 가진 리더는 실무자의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현장 상황을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니, '도전적인 수준'과 '불가능한 수준'을 구별할 감각도 부족할 가능성이 높고요. 그럼에도 실무자들은 리더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려 할 테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게 되더라고요.


먼저 앞의 사례처럼, 무리한 요구를 받는 실무자들은 구색 맞추기에 급급할 수 있어요.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과 자원이 필요해요. 시간도 자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면, 품질 수준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겠죠. 물론 품질 저하의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일정 단축이 회사 차원에서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리더의 전략적 판단의 영역일 거예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리더들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그로 인한 부작용까지 고려하는 경우는 많지 않더라고요. 놀랍게도 자신이 밀어붙이면 어느 것 하나 손해보지 않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면서요.


그럼에도 리더의 무리한 요구를 최대한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실무자들의 체력과 시간을 갈아 넣는 방법이에요. 예를 들어 실무자들이 하루 16시간씩 주말까지 일하면 3개월 작업을 1개월 안에 마칠 수 있겠죠. 문제는 이 방법이 조직의 생존 갈림길에 섰을 때나 가능한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이에요. 반복적으로 야근과 특근을 요구하면 실무자들은 결국 번아웃이 찾아오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업무 시간을 늘려도 오히려 생산성은 떨어지게 될 것이고요.


리더의 무리한 요구가 반복되면 직원들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다음 업무 계획부터는 최대한 일정과 자원 투입을 보수적으로 잡아놓을 수 있어요. 어차피 리더가 일정 단축을 요구할 걸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유를 두고 계획을 세우는 식이에요. 만약 이런 상황이 되면 회의실에 앉아서 일정 계획을 논의하는 시간이 쓸모없는 쇼에 그치고 말겠지만요.




현실에 발을 딛고

미래를 그리는 역할


리더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해요. 혁신을 말하고, 불가능에 도전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 모두 중요해요. 하지만 그 모든 건 현실을 기반으로 뻗어나가는 일임을 잊으면 안 돼요. 회사에서 말하는 현실이란, 직원들의 역량, 업무 시간, 투자 여력, 유/무형 자산 등 자원을 의미해요. 리더는 이 자원을 기반으로 회사의 목표를 달성해 내는 사람이에요.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 언급된 대사가 리더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회사가 원하는 임원이란 구름 위를 기어오르는 자가 아닌, 두 발을 굳게 땅에 딛고서도 별을 볼 수 있는 거인이었다."


직원들에게 혁신을 기대한다면 그들과 같은 현장에 있어야 해요. 무리한 목표를 던져 놓고는 뒷짐 지고 감시하는 자세로는 혁신을 만들 수 없어요. 리더가 현장에 있어야 직원들이 실제로 게으름을 피우는지, 목표 달성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은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판단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직원들이 필요한 의사결정을 바로바로 내려주면서 불필요한 고민의 시간을 줄여줄 수도 있고요. 앞의 사례에서 신제품 출시 준비 기간을 3달에서 1달로 줄일 수 있는 사람은 실무자들이 아니에요. 담당 리더 본인이죠. 리더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윤태호 작가 『미생』 136수 中 '거인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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