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팀장을 달았을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실무 업무는 그대로인데, 조직 관리와 업무 보고, 다른 부서 협업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갑자기 늘었죠. 하루 8시간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점심도 거르고 밤낮없이 일하기를 일상처럼 반복했어요. 심지어 팀원이 저와 미팅을 하려고 해도 최소 1주일 전에는 일정을 잡아야 했고, 회의는 늘 30분 이내로 빠르게 마쳤어요.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어요. 마치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제가 빠지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바쁜 상황이 오히려 자부심으로 다가왔죠.
본부장을 맡고 나서는 이전처럼 일하기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어요. 제가 맡은 본부에는 6개 팀이 있었어요. 그중에는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부서도 있었고요. 팀장 때처럼 모든 걸 챙기려면 단순 계산으로 6배의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어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방식은 모르겠더라고요. 결국 이전과 같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한참 후에 깨닫게 되었지만요.
당연히 여기저기 문제가 터졌어요.
첫째, 중요한 이슈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주간 단위로 팀별 업무 보고를 받았지만 다뤄야 할 사안이 방대하여 중요한 이슈 중심으로 논의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해당 이슈에 대해서는 별도 시간을 내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죠. 그렇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다 보니 회의 자리에서 즉흥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시작했어요. 상황 파악은 부족했고, 방향성은 모호했고, 판단에 자신은 없었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는 과거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요. 게다가 뒤늦게 판단을 뒤집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한 번은 해외 현지 유통사가 독점 유통권을 요구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검토 없이 이를 승인했다가 이후 영업 활동에 발목 잡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둘째, 눈앞에 긴급한 사안에만 매몰되었어요. 회사에는 매일 긴급한 일들이 쏟아졌어요. 품질 문제, 납기 지연, 고객 불만, 인사 갈등 등 하루도 이슈가 끊일 날이 없더라고요. 그나마 조직 내부 이슈는 괜찮았어요. 고객사 관련 이슈가 발생하면 수개월 동안 그 건 하나 해결에만 매몰되기도 했어요. 이런 이슈들에 몰두하다 보면 장기적이고 중요한 고민을 놓치게 되더라고요.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민하고, 일하는 방식과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조직 역량을 강화하는 등 고민은 사치에 불과했죠. 뒤늦게 깨달은 점이지만 긴급 이슈의 대부분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던 사안이었어요. 애초에 시간을 들여서 준비와 검토를 충분히 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이슈가 많았죠. 그렇지만 매번 시간에 쫓겨서 근본적인 개선의 기회 미뤘던 것 역시 제 선택이었어요.
셋째,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더라고요. 본부장이 되고 나서 3개월이 자나고 '더 이상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책을 맡아서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지만 그 대가는 컸어요. 잠이 부족해서 항상 피로했고, 머릿속에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현안 이슈들이 늘 괴롭혔어요. 가족과 온전히 교감하는 시간도 좀처럼 내기 어려웠어요. 회사 일이 정신과 체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오히려 연봉을 절반 혹은 그 이하로 줄여도 좋으니 팀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번아웃이었나 봐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지 못했죠. 부끄럽지만 이러한 마음 상태는 제가 내리는 판단의 품질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고객사와 중요한 출장을 앞두고 너무 지친 나머지 팀원을 대신 보낸 적도 있어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대충 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죠.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고위 리더로 역할을 하기 위한 저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제 주변에 좋은 조언을 건네준 선배 멘토도 많았어요. 그리고 의사결정과 리더십에 관련한 책을 읽으며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지금은 '의사결정 프로세스 정립'과 '정신적 여유'라는 두 가지 원칙을 정립해서 적용하고 있어요.
먼저, 고위 리더는 조직 내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정립해야 해요. 고위 리더가 되면 자연스럽게 권한 위임을 고민하게 돼요. 권한 위임은 단지 실무 결정과 책임을 담당자에게 맡기는 데에서 그치지 않아요. 효과적인 권한 위임을 위해서는 조직 내 그 누가 판단을 하더라도 같은 판단이 내려질 수 있도록 판단의 원칙과 기준, 그리고 우선순위가 세워지고 공유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각자 자기 판단대로 결정을 하게 될 테니까요. 팀원들에게 공유할 의사결정 원칙과 기준, 우선순위를 정리하면서 제 의사결정 방식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제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요. 이후부터는 점차 조직 내에서는 제게 결정을 내려달라는 요청이 확연히 줄었어요. 그렇게 실무자가 직접 판단을 내리고 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요. 덕분에 조직 내 의사결정 속도는 빨라졌고 실무자의 경험을 살려 현실에 더 적합한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어요. 이제는 팀원들이 절 자주 찾으면 제가 일을 제대로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은, 고위 리더는 정신적 여유를 가져야 해요. 고위 리더는 조직에 장기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소 1년 후부터 길게는 10년까지 미래를 준비하는 역할은 팀원들은 할 수 없는 고위 리더의 몫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위 리더가 실무 결정을 하고 있으면 그 조직의 미래를 고민하는 역할은 비어 있게 되는 셈이죠. 그러다 보면 조직은 방향을 잃거나 역량이 뒤쳐지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보통 1년 후 미래를 준비하는 결정은 불확실하고 복잡해요. 이 같은 사안은 즉흥적인 결정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워요. 다양한 정보를 이해하고, 현실 변화를 살펴보고, 가설 검증을 반복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지게 되어요. 오랜 기간 연속적으로 고민한 끝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이러한 판단을 정상적으로 이어가려면 리더는 정신적 여유를 갖고 있어야 해요. 저는 의도적으로 업무 시간을 하루 6시간 이내로 줄여 왔어요. 그 대신 나머지 시간에는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을 만나면서 시장 변화, 경쟁 우위, 조직 역량 세 가지 관점에서 조직이 갖춰 가야 할 점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어요. 명확히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장기적인 고민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제가 맡은 조직은 큰 계획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간다고 느끼고 있어요. 긴급 이슈를 쫓아다니는 비중도 확연히 줄었고요.
리더로서 일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많은 영감을 받은 사람은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예요. 베조스는 2018년 한 인터뷰에서 고위급 리더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어요. 고위급 리더에게는 의사결정의 양보다는 질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죠.
(리더는) 하루 세 번 결정이면 충분해요.
다만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결정이어야 해요.
최대한 심사숙고한 결정이어야 하고요.
베조스는 늘 아마존의 3년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고 해요. 아마존이 특정 분기에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려도 이에 대해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그 이유는 이미 3년 전에 내렸던 판단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해요. 현재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베조스는 늘 최상의 의사결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바쁜 와중에도 하루 8시간 숙면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업무를 시작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을 일깨운다고 하고요. 또한 오전 10시 이전이나 오후 5시 이후에는 고민이 필요한 회의를 잡지 않는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원칙들은 명료한 정신으로 중요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조치들이겠죠.
세계적인 기업의 리더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해요. 그렇지만 반대로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경영한 덕분에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이 될 수 있었겠죠.
리더는 큰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해요. 리더가 바라보는 시야의 크기만큼 조직의 성장 한계도 정해져요.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더 멀리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해요. 물론, 현실의 리더라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긴급 이슈는 끊이지 않고, 매일의 성과에 대한 압박은 무겁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조직에 더 도움이 될지, 그리고 리더로서 해야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