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그룹사 L사는 매년 11월 사업보고회를 열었어요. 계열사별 성과를 보고하고, 다음 해 계획을 승인받는 중요한 자리였죠. 보고회 준비 과정은 치열했어요. 3~4개월 전부터 기획 부서를 중심으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시장을 전망하고, 전략을 세웠어요. 이를 반복해서 검토하고, 세부 실행 계획까지 짜느라 직원들은 매일같이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문제는 이렇게 쏟아부은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계획 수립 당시에는 타당했던 전제가 불과 몇 달 만에 흔들리곤 했어요. 예컨대, 오랜 준비를 거쳐 추진해 온 미국 시장 진출이 갑작스러운 관세 부과로 판이 바뀌는 식이었죠.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은 거의 매년 발생했어요. 한껏 고생해서 만든 사업 계획이 현실에서 힘을 잃는 순간, 허탈감이 몰려왔어요. 그렇다고 다시 계획을 세우자니 또 헛수고가 될까 두렵기도 했고요.
그런 상황에서도 사업부장들은 대부분 기존 계획을 고수하고자 했어요. 현실과 계획의 괴리를 메꾸는 건 실무진 몫이었어요. 하지만 실무진에서 요청하는 추가 예산, 일정 조정, 우선순위 변경 등 요구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사업부장은 계획을 변경하기보다는 최대한 실무진을 압박하며 현실을 계획에 맞추기를 바랄 뿐이었죠. 결국 실무진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요. 직장인의 슬픈 숙명이죠.
당연히 현실에서 동떨어진 계획은 달성되기 어려웠어요. 성과 보고서에는 늘 비슷한 문구가 반복되었어요. "급격한 외부 환경 변화로 목표 달성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유의미한 진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늘 비슷한 패턴이었어요. 이처럼 핑계와 변명으로 채워진 보고서는 연례행사처럼 굳어졌어요.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연간 계획의 효용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어요.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입할수록 그 효용성은 더 낮아지고요. 베인앤컴퍼니의 파트너인 마이클 맨킨스(Michael Mankins)와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해요. [1]
1. 아무리 공들여도 계획은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2. 부서 단위로 짜인 계획은 회사 전체 최적화와는 거리가 생긴다.
3. 결국 보고용으로만 쓰이고, 실제로는 참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업이 공들여 사업 계획을 세우고, 한 번 세운 계획에 집착하는 이유는 있어요.
첫째, 계획은 성과 평가와 보상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에요. 많은 기업에서 사업 계획 달성 정도에 따라 승진과 인센티브 등 보상을 다르게 설계해요. 그러다 보니 사업 계획이 변경되면 보상 체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고수하려고 해요.
둘째, 매몰 비용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에요. 보통 연간 계획은 수개월 동안 수많은 사람과 자원을 들여 만든 결과물이에요. 투입된 시간과 자원을 고려한다면 이를 뒤집는 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셋째, 리더의 심리적 안정감 때문이에요. 합의된 계획은 책임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반대로 계획을 바꾸면 책임은 고스란히 해당 리더에게 돌아오게 되겠죠. 보통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기대보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리더 스스로 의사결정자로서의 역할을 바로 세워야 해요. 사업 환경이 바뀌면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에요. 설령 상위 부서와 이미 합의된 계획일지라도,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길이라면 과감히 수정해야 해요.
조직 차원에서는 사업 계획을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렇게 한다면 연간 계획 수립에 많은 자원과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어져요. 게다가 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 위한 부담도 적어지고요. 추가로 계획 준수보다는 문제 해결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변화에 더욱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슈 해결 중심의 회의를 도입할 필요가 있어요. 이슈 해결 회의는 지금 목표 달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목적을 가져요. 성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과장하고 실패는 축소하는 성과 보고 회의와는 차이가 있어요. 문제를 드러내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바로 대응하는 과정이 쌓이면 조직은 현실과 계획의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어요.
스타트업 N사는 연간 계획을 '방향성' 정도로만 활용했어요. 연간 계획에는 회사의 지향점, 사업 우선순위, 그리고 각 사업별 주요 마일스톤을 명시했을 뿐, 부서별 실행 계획까지 세분화하진 않았어요. 계획 수립에 2주 이상 시간을 쓰지도 않았고요. 그렇지만 실행 계획은 각 조직 리더의 책임으로 맡겨 두면서 의사결정자로서 리더 역할을 강조했어요. 이에 조직 리더는 상황 변화에 따라 과감히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졌어요.
N사는 매월 사업부와 경영진이 모여 이슈 해결 회의를 진행했어요. N사는 매출, 일정, 비용 세 가지 측면에서 '이슈' 리스트를 관리하고 있었어요. 즉, 목표 대비 일정 수준 매출이 떨어지거나, 일정이 지연되거나, 비용이 초과되는 사안을 이슈로 등록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서 심각성과 대응 우선순위를 구분했죠. 회의에서는 1~3순위 이슈에 대한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 도출을 집중적으로 다뤘어요. 하나의 이슈가 해소되면 다음 우선순위 이슈를 다루는 등 끊임없이 문제 해결에 집중했죠.
평가와 보상 체계 역시 이슈 해결에 집중되었어요. 회사 전체적인 성과의 경우 차등이 크지 않도록 분배되었어요. 반면 이슈 해결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서 개인 특별 보너스 지급과 종합 평가에 크게 반영되었어요. 덕분에 구성원들은 억지스러운 계획에 끌려다니기보다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어요.
이런 방식이 N사를 예측 불가능한 시장에서도 성장하게 만들었어요. N사는 지난 3년간 매년 조직 규모가 2배 이상 성장했고, 해당 기간 동안 800억 원 이상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했어요.
스타트업인 N사와 대기업 L사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달랐어요. N사는 1년 뒤에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생존의 기로에서 경영을 해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수개월에 걸쳐 사업 계획을 세우고, 현실과 동떨어진 사업 계획을 유지했다면 너무나 큰 대가로 돌아왔을 거예요. 반면 L사는 안정적인 사업을 구축한 덕분에 현실과 맞지 않은 계획에 발이 묶인 채로도 생존할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앞으로 3년 뒤, 5년 뒤에는 두 회사의 위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어요.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는 모호한 영역에서 만들어져요. 계획은 평상시에는 편안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성과를 보장하지는 못해요. 결국 성과는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모호한 영역에서 리더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어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뛰어드는 용기. 그것이야 말로 성과를 만들어 내는 리더의 자질이에요.
[1] Mankins, M., & Steele, R. (2006, January). Stop Making Plans; Start Making Decisions.Harvard Business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