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일기
일요일이다. 캠프출발일이 5일째 지연되었다. 어제까지 듣기로는 주말이 끝나고 비행기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뉴질랜드기지에서 비행기가 뜬다는 연락이 왔다. 월동대는 휴무일, 아침도 먹지못하고 정신없이 짐을 꾸리고 설상차로 옮겨 실었다. 하루 종일 변변찮은 화장실을 찾지 못하리라. 화장실에 들러 일을 보고 눈꼽을 떼고 냉장고의 빵을 하나 꺼내 급히 찬물과 함께 배를 채웠다. 설상차에 몸을 싣고 해빙활주로에 나섰다. 과연 약속한시간에 작은 경비행기인 트윈오터가 먼저 도착하고 곧이어 좀 더 큰 경비행기인 배슬러가 도착했다. 서둘러 미리 비행기 순서대로 나눠놓은 컨테이너속 화물을 차례차례 비행기에 올렸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설상차에 달린 태극기의 펄럭임으로 짐작하기에 족히 10m/s이상은 되어 보였다. 예보에 바람은 없었고, 심지어 약 2km 떨어진 기지는 바람이 안불고 있다고 한다. 다들 긴장하기 시작했고 배슬러 파일럿은 이미 비행기를 해빙에 고정하고 있었다. 경비행기는 이정도의 바람에는 이륙하지 못한다고 했다. 낭패다. 발은 얼어오고 비행기이륙에 대비해 먼저 헬기를 타고 캠프지로 날아가 비행기 임시활주로를 만들고있는 정박사님과 안전요원이 걱정이다. 캠프지의 날씨는 매우 좋다고 하는데, 바람부는 활주로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이 야속하다. 바람을 피해 들어간 설상차 내부에서 도시락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뉴질랜드 연구자의 휴대전화에 있는 오래된 팝송을 들으며 추억 얘기를 나누었다. 비틀즈, 핑크플로이드 그리고 알 수 없는 옛 가수들의 노래가 정겹다. 태극기는 여전히 설상차위에서 힘차게 펄럭이고 기약 없는 시간이 음악과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남극에서는 이런 일들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모두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기지와 캠프지로 날아간 사람들사이에 무전은 오가지만 그 안에 정보들은 무의미한 희망만을 얘기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늘 비행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얘기가 파일럿의 입에서 나왔다. 캠프지의 사람들이 걱정이다. 결국 오후 4시를 넘겨 파일럿은 오늘 출발이 어렵다고 알려왔다 .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바이벌백만 챙겨 헬기를 타고 캠프지에 날아간 정박사님과 안전요원 관재씨에게 연락을 취해 기지로 복귀하도록 했다. 허탈했으리라. 배슬러 파일럿 세명과 트윈오터 파일럿 두 명도 장보고기지에서 하루를 지내기로했다. 내일 아침 상황을 봐서 바로 출발하기로 하고, 짐을 다시 꺼내 설상차에 올렸다. 기지로 돌아가는 중에 바람은 멈추었다. 활주로에만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우연히 바람이 멈춘것인지 더 아쉬움이 남았다. 캠프지까지 헬기로 먼저 갔던 사람들은 저녁 7시가 넘어서 복귀했다. 헬기사용료도 낭비가 되어 버렸고, 하루종일 찬 바다얼음위에서 대기한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하루이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2017-18년 남극출장을 다녀온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8-19년 출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후면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것 같습니다. 출장준비를 하며 지난 출장기록을 뒤적이다, 작년 첫 캠프나가는 날의 일기를 올려봅니다. 올해 출장일기는 매거진의 "펭귄과 함께한 남극캠프일기"로 소식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