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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우 Jun 26. 2018

남극의 블리자드

1. 세종기지편

2012년 11월 말. 세종기지에 들어가서 몇일 지나지 않았을때다. 하루는 주방장 동생과 펭귄마을에 가게되었다. 펭귄 번식조사를 혼자 수행하던 시기인데, 주방장 동생이 쉬는날을 맞아 나를 도와준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바람도 불지않고, 맑은 날이었다. 시시각각 날씨가 급변하는 남극이라지만, 이날은 눈예보도 없는 날이라 블리자드를 만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펭귄마을에 도착해 조사를 수행하던 중,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정도야 흔한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눈발이 거세지더니 순식간에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화이트아웃 상태가 되었다. 혼자라면 딱히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주방장 동생을 데려간터라 서둘러 복귀하기로 했다. 기지에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무전이 와서 복귀중이라고 답하고, 서둘러 기지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펭귄마을은 세종기지에서 직선거리 약 2km 떨어져있어 해안으로 걸어가도 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주 다니던 길이라 바닥만 보고도 어디인지 알 수 있을정도로 익숙하지만,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화이트아웃은 처음 겪는 일이라 조심해서 한발한발 내딛었다. 같이간 동생은 남극에 들어온지도 몇일 되지 않았는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않아 안심시키려고 걱정말라 얘기했는데, 돌아본 동생의 얼굴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사실 화이트아웃은 남극에서 안개나 눈바람으로 인해 흔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다. 펭귄마을의 경우 해안길로만 돌아오면 기지로 복귀하는게 크게 어렵지 않지만, 과거 다른 기지에서는 화이트아웃이 발생했을때 길을잃고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례가 있어 야외활동시에는 반드시 GPS를 지참해야하고, 먼 거리를 이동할 경우에는 서바이벌킷이라고 불리는 생명유지 장비를 챙겨 나가야 한다. 

초속 20m가 넘는 바람을 헤치며 기지로 향하는데 얼음같은 눈알갱이가 옷틈사이로 파고 들었다. 멀티스카프로 얼굴을가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앞서 걷는 나는 걱정이 되어 긴장상태로 가는데, 뒤따르는 동생은 제대로 남극 체험한다고 즐겁다는 듯이 말을걸어와 이걸 웃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다행히 기지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려엔 화이트하웃 현상은 사라지고, 눈발도 약해졌다. 가져간 카메라는 가방안에 넣어두고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는데, 같이간 동생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세종기지에서 블리자드는 흔하게 겪어봤지만, 화이트아웃을 동반한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즐거워하는 동생과 기지에 도착해 눈을 떨어내고, 옷을 갈아입는데 속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어지간히 긴장했던 모양이다. 

화이트아웃에 가까운 눈바람이 몰아친 어느날. 세종기지에서

남위 62도 부근에 위치한 세종기지는 사실 남극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어 내가 방문하는 시기에는 남극에서도 따뜻한 편이다. 12월부터 1월까지는 남극의 여름시기인데, 평균기온이 영하1도정도로 오히려 한국보다 기온이 높은 날도 많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센편이라, 체감기온은 항상 영하를 찍는다. 바람이 적게 부는날도 하루중 한두번은 5m/s이상의 바람이 부는 편이라 야외조사를 할때는 항상 따뜻한 모자와 방한용품을 가방에 챙겨다니곤 했다. 눈이오는날은 오히려 괜찮은 편이다. 간혹 눈에 비가섞여 내릴때는 옷이 젖기 때문에 체온이 더 빨리 떨어진다. 그래서 비가오는 날에는 조사를 거의 나가지 않으며, 조사중에 비가오는 경우에도 얼른 기지에 복귀하곤 했다. 

연중 바람이 강한 세종기지에는 블리자드도 흔하게 만나게 되는데, 내가 기지에서 만난 가장 센 바람은 초속 45m를 넘는 바람이었다. 세종기지는 식사를 하는 본관동건물과 잠을 자는 숙소건물, 빨래와 샤워를 하는 유지반 건물 등 건물들이 나눠져있는 구조라 블리자드가 부는 날에도 다른 건물로 가기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초속 30m만 넘어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센데, 40m가 넘으니 서서가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건물안에 있어도 웅웅웅 하는 소리와 건물의 떨림이 느껴졌다. 바람만 부는 날은 그나마 나은 편인데, 눈이라도 동반할때는 더 난감하다. 눈을 몰고온 바람이 건물에 부딪혀 건물뒤로 소용돌이 치고, 이곳에 눈의 산을 만든다. 블리자드가 부는날 하루세끼 밥을 먹으러 본관동에 내려가는데 눈산을 만난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내 키보다 높게 쌓인 눈산을 허벅지까지 빠져가며 간신히 넘어가 식당에 도착하면 옷속에는 눈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날엔 식사를 포기하고, 연구동에서 과자나 라면으로 때우기도 했다. 바람이 너무 강한날에는 건물 아래 빈 공간으로 기어서 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초속15m가 넘는 바람이 세시간 이상 지속되면 블리자드라고 부른다. 눈을 동반하기도 하고, 바람만 불기도 하는데, 세종기지에서 블리자드가 불면 컨테이너로 지은 건물벽이 떨려 잠을 설치기도 했다. 하루는 자기전에 날이 좋아 창문을 열어놓고 잤는데, 자는도중 건물이 울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블리자드가 부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아누웠는데, 차갑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 몸을 돌려보니 눈이 침대옆까지 쌓여있었다. 작은 창문틈새로 쉴새없이 눈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미련하게도 침대까지 눈이 들이칠때까지 모르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에 깨서 눈을 다 치우고 창문을 닫으려는데, 그만 미닫이 창문 손잡이가 똑 하고 부러져버렸다. 바깥의 찬바람에 손잡이가 얼어있다가 세게 당기는 힘에 부러져버린 것이다. 하는수없이 창문을 직접 손으로 잡아 적당히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밤엔 제대로 잠을 못자고 기상음악이 나오자마자 본관으로 달려가 유지반장님께 수리를 부탁드렸다. 

세종기지의 블리자드. 눈이 옆으로 흐르고, 건물뒤에는 눈이 쌓인다.


블리자드가 부는날은 밥먹으러 가는길도 고역이다.

블리자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펭귄에게도 시련이다. 세종기지 인근에서 번식하는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은 땅위에 둥지를 짓고 번식한다. 남극은 90%이상이 눈에 덮인 지역인데, 일부 해안지역이나 능선부는 땅이 노출되어있다. 한국처럼 눈이 차곡차곡 쌓일 정도로 바람이 없는 날은 거의 없기 때문에 땅이 노출된 곳은 대부분 바람이 센 지역이다. 그래서 펭귄번식지는 대부분 바람이 세다. 땅위에 돌을 물어다가 분화구 모양의 둥지를 만들고 번식하는 펭귄들은 바람이부나 눈이오나 둥지의 알과 새끼가 얼지않도록 몸을 납작 엎드려 품는다. 자칫 알이 삐져나오거나, 틈이있으면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알이 썩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교대할때를 제외하곤 알을 최대한 공기중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블리자드가 불때 일부 둥지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바람만 부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데, 눈을 동반한 바람이 부는 경우 위치가 좋지않은 둥지는 눈에 파뭍히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둥지가 눈에 파뭍히면 눈이 녹으면서 알이 물에 잠기게되고 부화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둥지들은 주로 번식지의 가장자리나 낮은 곳에 위치한다. 경험적으로 이런 사실을 아는 펭귄들은 그래서 다른펭귄보다 먼저 번식지에 돌아와 번식지의 중심부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블리자드가 지나간 이후 눈에 파뭍힌 젠투펭귄 둥지
눈에 파뭍힌 턱끈펭귄 둥지. 알은 이미 물에 잠겼지만, 필사적으로 알을 품는다.


2013년 1월. 세종기지에 약 8일간 블리자드가 불었다. 펭귄 번식조사를 수행중이라 매일 펭귄마을에 가야했는데, 블리자드가 연일 지속되니 갈 수가 없었다. 블리자드가 그치자마자 펭귄마을로 향한 나는 눈에 피해를 입은 많은 둥지를 볼 수 있었다. 오랜세월 남극에서 번식하고 살아온 펭귄에게도 자연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눈에 피해를 입은 이 둥지들은 피해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펭귄마을에 번식하는 두종의 펭귄인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은 서식지가 서로 분리되는데, 젠투펭귄이 상대적으로 높은곳에, 턱끈펭귄이 상대적으로 낮은 바닷가에 번식지를 형성한다. 젠투펭귄의 피해만을 보고 턱끈펭귄 번식지로 내려가보고 깜짝 놀랐다. 일부 번식집단 전체의 새끼가 모조리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왠만한 바람이나 눈에는 이정도로 죽지 않았을텐데, 자세히 보니 많은 새끼가 죽은 곳은 바위와 바위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 둥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강한바람에 바닷물이 날려 계곡사이로 들이쳤고 이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새끼들이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어서 죽어갔던 모양이다. 방수깃털을 가진 어미들과 달리 솜털을 가진 새끼들은 물에 쉽게 젖는다. 왠만한 바람에는 바닷물이 그곳까지 들이치지 않았을 것이다. 초속 30m가 넘는 바람이 8일간 계속되는 사이 바닷물에 젖은 새끼들이 몰살되었던 것이다. 젠투펭귄에 비해 먹이터인 바다와 가까운 곳에 둥지를 만든 장점이 있지만, 이러한 갑작스런 상황에서는 더 많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지역이었던 셈이다. 5번의 세종기지 방문중에서도 유일한 경험이었으니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을 터이다. 이런일이 지속된다면 턱끈펭귄의 개체수가 한순간 감소할지도 모를일이다. 세종기지가 위치한 남극반도 주변지역은 남극에서도 기후변화가 가장 빠른곳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이런 기후변화와 함께 지역적인 기상변화 또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오랜세월동안 이곳에 적응하고 살아온 펭귄들이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블리자드에서 살아남은 펭귄들이 번식에 성공해 다시 이곳 번식지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래보았다. 

턱끈펭귄 어미와 새끼. 방수깃털을 가진 어미와 달리 새끼들의 털은 물에 쉽게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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