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어느날. 세종기지에서
건물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6시. 아직 한시간은 더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부지런한 몇몇 연구원들이 벌써부터 숙소동을 돌아다니는 발소리에 잠이 깼다. 세종기지에 들어온지 벌써 한달이 지났다. 보통은 방음이 되지 않는 컨테이너 숙소동에서도 잘 자는데, 오늘은 건물 밖에 블리자드가 몰아치는지 건물의 떨림이 심상치 않다. 가만히 침대 옆 작은 창문의 커텐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하얀 눈만 보인다. 숙소동 바로 앞에 위치한 연구동의 붉은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이러다간 출남극전에 더 바빠질텐데..." 한숨이 나왔다. 벌써 여러차례 블리자드가 불어 조사일수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다. 맞은편 침대에는 같이 일하는 후배 2명이 이층침대에서 곤히 자고있다. 어제 저녁엔 기지내 회식이 있어 늦게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오늘 예보에 블리자드가 있어 조사를 나가기 어려울 것 같으니 편하게 늦잠을 자라고 말해둔 터였다.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강한 바람으로 단단히 버티고 있는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문 앞으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생물연구동으로 건너가기도 쉽지가 않다. 지퍼를 단단히 여미고, 모자를 누르며 계단을 내려가 생물연구동으로 건너갔다. 그 일분도 안되는 사이에 온몸이 눈사람꼴이다. 잠이 덜깬 상태로 바람을 맞아서인지 더 춥게 느껴졌다. 휴게실로 가서 커피한잔을 내려 마시고,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극은 남극인 모양이다. 건물안에서도 발아래 한기가 느껴졌다. 라디에이터를 끌고와 책상아래에 넣고,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블리자드 여파인지 안그래도 느린 인터넷이 더 느린것처럼 느껴진다. 잠깐 인터넷 기사를 검색 하고, 페이스북으로 한국의 지인들의 생활을 보니, 한국에도 한파가 몰아친다고 한다. 벌써 4년차 한국의 겨울동안에 남극에 오다보니, 사진으로 보는 한국의 겨울 풍경이 낯설다. 그 피부를 찌르는 듯한 추위는 남극의 추위와는 다른 느낌일 것이다.
처음 남극에 가서 연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남극? 남극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정도로 생각했고, 내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대학생활 내내 조류관찰동아리 활동에 빠져 살다, 본격적으로 대학원 준비를 하던 도중 우연한 기회에 환경조사업체에서 일을 하게되고, 또 대학원에서 남극연구 제안을 받게 되기까지의 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대학교를 마칠 때 과연 새를 보면서 살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후회되거나 힘든 일들도 많았지만, 칠레를 거쳐 정말로 세종기지를 눈앞에 뒀을 때 참 재밌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조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역마살이라는 말이 자못 나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늘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그 마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이곳에서 나는 펭귄의 번식생태 연구를 하고 있다. 세종기지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의 번식지가 있는데, 날씨가 허락하는 한 거의 매일 방문하여 번식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새의 번식지를 조사한다는 것은 냄새와의 싸움이다. 펭귄들이 싼 똥은 번식기간동안 계속 땅에 쌓이는데, 시간이 갈수록 썩고 흘러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이곳에서 펭귄을 붙잡아 위치추적기를 달고, 개체측정을 하다 기지로 돌아오면 다른 연구원들이 피해다녔다. 이제는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 재밌기도 하지만 펭귄 똥이 뭍은 손을 대충 닦고, 비닐에 담아온 주먹밥을 먹다보면 가끔 내가 지금 머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화장실도 없고, 바람을 피할곳도 없는 야외에서 하루종일 펭귄들과 씨름하며 외로움도 많이 느꼈었다. 바람을 막아줄 곳을 찾아 펭귄마을을 홀로 돌아다니다, 바위뒤에 웅크리고 휴대폰의 가족사진을 보며 위안을 삼았던 적도 많았다. 예전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는 연구원들이 많아져 혼자 다닐일이 없고, 힘든일들도 함께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다.
컨테이너로 지어진 연구동의 벽이 웅웅소리를 내며 울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모양이다. 별수없이 오늘은 기지에서 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오늘은 미뤄뒀던 데이터 정리와 빨래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유지반에 놀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으러 가야하는데 본관동까지 갈 일이 걱정이다. 배고픔과 바람사이에 저울질하다 장갑과 모자, 고글에 장화까지 완전무장하고 연구동 건물을 나섰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뒤에서 나를 밀었다. 바람은 건물을 타고 돌아 건물뒤에 높다랗게 눈산을 만들어 놓았다. 어찌할수 없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산을 넘어갔다. 밥먹으러 가는길이 험난하다. 이 바람속에서도 도둑갈매기 한마리와 남방큰풀마갈매기 한마리가 바람을 타고 날고 있었다. 남극에 사는 동물들에게도 블리자드는 시련이다. 본관동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새로 지은 밥냄새가 훅하고 들어왔다. 식당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