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대학교에 가면 어떤 공부를 할지 가끔 생각하곤 했다. 이과생이었던 탓에 어쩌면 당연히 공대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공대를 가면 전자과나 기계과를 가서 회사를 다니는 생각도 했다. 과목 중에 과학을 제일 잘했고, 그중에서도 화학과 생물은 시험에서 거의 100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 덕에 화학과를 가야 할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당시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고 살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고3이던 1999년 시작되어 매주 수요일 저녁 10시에 방영되는 KBS환경스페셜이었다. 잘 알지는 못해도 동물과 자연이 나오는 그 다큐멘터리 프로가 이상하게 재밌었다. 생물공부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그때 처음 생각했다. 가장 생각지 않았던 생물학과를 고3 막바지에 가서야 원하는 학과 제일 윗줄로 올려놓았다. 딱히 정보를 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성적에 맞추어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아니, 정확한 명칭은 생명과학과였다.
학과 수업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학부 수업에 동물학은 없었고, 유전학, 세포생물학 등 분자생물학 관련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은 생명과학과는 생물학과에서 이름만 바뀐 거라고 했는데, 선생님도 잘못 알고 계셨던 거였다. 생명과학과는 분자생물학을 주로 다루는 학과고, 정통 생물학과와는 차이가 있었다. 나름 열심히 다녔지만, 전공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동아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입학 때 나눠주는 동아리 안내서에서 ‘야생조류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찾았다. 작은 맹금류 한 마리를 그려놓았는데, 세밀화도 아니고 그림 좀 잘 그리는 학생이 그린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름 특징을 잘 살린 그 검은색 그림을 들고 동아리방 문을 두드렸다.
야생조류연구회는 자유로웠다. 때가 되면 동구릉, 강화도, 철원, 한강, 낙동강, 금강 등 철새도래지를 돌아다니며 새를 봤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거리를 가지 않을 때는 학교 주변에서 탐조를 했다. 학교는 서울시내에 있었지만, 학교 뒷산은 나름 규모를 가진 도심지 산이었고, 산 넘어서는 중랑천과 한강이 이어졌다. 이동하는 새들에게는 나름 요지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거의 매일 학교 뒷산에 올라 새를 봤다. 쌍안경 하나만 들고 시도 때도 없이 뒷산에 올랐다. 계절은 산에서 가장 빠르게 왔다. 겨울이 지나 4월이 가까워오면 아직 아침저녁의 쌀쌀한 공기가 느껴지는 때라도 뒷산에 오르면 푸릇푸릇한 잎들이 봄을 알렸다. 그 연한 푸름이 진한 녹색으로 바뀌면 여름이 되었고, 색이 옅어지고 주황빛이 돌기 시작하면 가을이 되었다. 아침 수업 전에, 공강 시간에, 점심을 먹고 뒷산에 올랐다. 당시에만 해도 뒷산에는 등산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다니기에 쉽지 않았지만, 긴 코스, 짧은 코스를 정해 시간에 맞춰 돌았다. 새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았다. 덤불이 많은 곳을 지나면 덤불을 좋아하는 새들을 기대하고 계곡부를 지날 때는 계곡을 좋아하는 새들을 기대했다. 계절별로 다양한 새들을 뒷산에서 만났다.
봄을 가장 빨리 알리는 새는 유리딱새와 울새였다. 나뭇잎들이 연두색을 띠는 시기에는 눈이 땡글한 유리딱새를 만나고 싶어 자주 올랐다. 덤불 속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유리딱새를 만나면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새의 이름에 ‘유리’가 붙으면 몸에 파란색을 가지고 있다는 새라는 의미다. 주로 수컷이 암컷보다 파란색이 많고 더 화려하지만, 유리딱새는 암컷이 더 좋았다. 그 수수한 색깔에 꼬리만 파란 새가 너무 이뻤다. 유리가 붙은 새 중에 가장 작은 쇠유리새는 초여름쯤 만났다. 점심시간이 지나 두 시간여 긴 공강 시간에 홀로 뒷산에 올라 몰려오는 춘곤증에 누가 가져다 둔지 모를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박새, 쇠딱다구리, 직박구리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깜빡 잠이 들었다.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살며시 눈을 뜨자 내 발 앞 1미터 정도 가까운 거리에 쇠유리새 수컷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보자마자 쇠유리새란 것을 알았다. 등의 선명하고 시원한 파란색과 대비되는 배의 흰색, 눈 주위의 검은색이 도감에서만 보던 딱 쇠유리새였다. 가슴에는 쌍안경을 매고 있었지만 들어 올릴 필요도 없었다. 새와 그렇게 가깝게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바닥에서 무엇을 찾는지는 몰랐지만, 쇠유리새는 나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등걸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이면 달아나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맨눈으로 한참을 쇠유리새의 행동을 관찰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한참이나 나랑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쇠유리새는 얼마 후 그 장소에서 볼일을 다 본 듯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새는 떠났지만,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새파란 색을 오래오래 음미했다. 아무래도 새를 오래오래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 촬영 - 이진희 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