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재학했던 모교에는 권역외상센터가 있었다. 항상 피곤한 얼굴을 한 채, 피 묻은 근무복을 입은 외과 선생님들의 모습이 참 멋지게 느껴졌다. 굉음을 내는 닥터 헬기에서 내려 환자를 실은 베드를 끌고 뛰어가는 의료진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보던 ‘멋진 의사상’과 닮아 있었다.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외과 전공의가 되면, 교수님과 함께 혈흔이 낭자한 수술실에서 파란 수술복을 입고 집도하고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사직 전, 나는 조용한 면담실에서 하얀 셔츠에 가운을 입고,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로 3년여간 근무하고 있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진로 변경의 배경에는 본과 3학년 시절, 한 달간의 잊지 못할 정신건강의학과 실습 경험이 있었다.
처음 정신과 보호병동의 문을 열고 들어간 느낌은 ‘와 망했다.. 여기서 어떻게 한 달 동안 지내지’였다. 당시에 정신과 실습 프로그램은 하루 종일 보호 병동에서 환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었다. 학생당 배정된 환자와는 매일 면담하고 면담 내용을 전공의 선생님들과 토의해야 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이상한’ 환자들과 지낼 생각을 하니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매일 매일 환자들과 어울리며 점차 환자들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환자분이 살아온 여러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삶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좌절하고 약물을 과량으로 복용하셨던 분. 자신에게만 들리는 모르는 여성의 속삭임에 고통스러워하며,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하루 종일 불안에 떨고 있는 분. 보호 병동에서 각자의 아픔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과 환자들은 ‘이상한’ 환자가 아닌 ‘아픈’ 환자인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신과 교과서에 적혀있는 ‘우울감’, ‘망상’ 등의 용어로는 환자들의 삶의 무게와 고통의 정도를 표현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물치료와 더불어 환자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는 의료진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꿈꾸던 외과 의사의 모습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메스가 아닌 따뜻한 공감으로 환자의 마음을 열어보고, bleeding focus를 찾는 것과 같이 복잡한 마음의 구조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손상된 자기(Narcissistic injury)를 발견하는 정신과 의사의 모습은, 당시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특히 내가 배정받은 환자가 퇴원하면서 나와의 면담이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건넸을 땐, 마치 내가 대단한 도움을 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달 뒤, 실습을 마치고 보호 병동의 문을 나설 때는 정신과 전공의로 다시 이 병동에 들어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운 좋게 목표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가 된 3년간 임상 현장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당시의 결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 의료 환경에서 정신건강의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소지훈 교수님께서 2023년에 발표하신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정신과 보호 병동은 10%가량 감소하였다. 투입되는 노동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저수가 정책’과 더불어 ‘입원실 병상 거리 규제 정책’ 등 현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정책들이 주요 원인이었다. 보호 병동은 정신과 치료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다. 보호 병동의 제한된 자극과 규칙적인 환경 속에서 환자들은 자신과 외부 세계에 대한 공격성을 줄이고 점차 안정감을 되찾는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 환자들은 의료진에게 훨씬 더 자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의료진 역시 안전한 환경 속에서 환자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은 채 온전히 환자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다. 어떠한 제한도, 안전장치도 없는 일반 병동에서 임상경험이 전무 한 학생들이 환자들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보호 병동은 점차 줄어가는 상황 속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으로 인해, 내년부터 5천명의 학생이 의과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이 학생들이 정말 의미 있는 정신과 임상 실습을 할 수 있을까. 정신과 환자들은 단 한 명의 의료진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느끼시는 경우가 많다. 환자 수보다 많은, 실습 학생들로 북적이는 병동에서 환자들이 쉽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학생들은 환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진심(眞心)을 관찰하는, 정신건강의학의 핵심 술기를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채 졸업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없던 본과 3학년 학생이었던 내가 보호병동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후배들도 온전하게 경험하고 느껴서, 그들의 의사로서의 삶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