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휴가를 다녀왔다.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으로 말이다.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는 무언가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서 이미 휴가가 끝나버린 지금, 휴가를 천천히 회상하고 곱씹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 한국을 다녀오기로 결정하기까지 고민을 좀 했었다. 나의 휴가는 쉽사리 쓸 수 없기에 나에게 휴가란 정말 소중하다. 그런데 그 휴가로 한국을 가버리면 ‘내 휴가를 온전히 나를 위해 즐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내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을 가기로 결심했다. 한번쯤은 가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이 들었고, 나 스스로도 내가 한국이 매우 그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휴가는 겨우 9일밖에 되지 않았기에 나는 약속을 많이 잡을 수는 없었다. 막상 휴가가 다가오자 가족 만나는 날과 여행 가는 날, 돌아가는 날을 제외하니 나에게 남은 날이 별로 없었다. 그 순간에 이건 휴가가 아니라 마치 출장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럼에도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기대하게 됐다. 나를 만나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정신이 없던 내가 신경 쓸 새도 없이 이미 그들은 나를 위한 계획을 뚝딱 만들어두었다.
인천공항에서 입국하던 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짧은 장면은 내 마음속에 저릿하게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수하물을 기다렸다가 짐을 찾고 입국을 했는데, 부모님과 친구들이 똘똘 뭉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대감에 가득 차고 반가움을 뿜어내는 그 눈빛들 하나하나는 마치 카메라 플래시처럼 너무나도 밝아 내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알았다. 참 고마웠다. 그 밝고 맑은 환영의 에너지는 나를 어딘가로부터 안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진짜 한국에 왔구나’ 생각했다.
정신없는 환영식을 거치고 점차 차분히 한국에 풍경을 둘러보고, 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내가 느낀 한국의 첫인상은 매우 낯설었다. 현실적인 풍경과 날씨는 싱가포르와 180도 달랐고, 그 낯선 풍경들은 마치 나를 어린 과거로 다시 돌려보낸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착각은 나의 세계와 시선이 전보다 확장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제자리에 다시 머물게 될까 봐 섬찟함도 같이 느껴졌다.
정신없던 첫 번째 날은 한국에 적응하기 바빴다. 그리고 두 번째 날부터 친구들과 국내에 한 지역으로 여행을 갔다.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지만, 사실 가는 곳이 어디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좋았다. 내가 간 그곳은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펜션에서 내가 가지고 온 선물도 풀어보고, 장을 보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고기를 구워 먹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와 밀린 이야기들을 쏟아내듯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듯한 이야기보따리들을 훌렁 풀어냈고, 우리는 웃기 바쁘고 어느 순간보다 집중해서 떠들어댔다. 친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신남은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다.
여행을 마치고, 친구들을 간간히 계속 만났다. 그 와중에 아는 동생은 군대도 갔다. 나 역시 일주일 뒤면 싱가포르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내 코가 석자라 그 동생을 좀 더 진득하게 위로하며 보내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누구보다 잘 아는 그 느낌을 시끄러운 술자리에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공감했다. 언제나 바람에 팔랑대지만, 심지는 굳은 그 녀석을 좀 믿어보기로 했다. 다치지 않기를.
부모님과도 따로 날을 잡아 외출을 했다. 다 좋았지만,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했던 대화들과 느꼈던 감정들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내년에 대한 나의 계획과 태도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얘기를 나누었다. 일종의 과제 같은 대화 주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내 목소리에 당당해졌기에 그런 건지, 우리의 관계가 언제 이렇게 두터워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이 관계가 서로에게 고마웠다.
사실 휴가 때,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느낀 것이 있다.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들은 이미 각자가 흘러가는 방향과 속도가 너무나도 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너무 다른 곳을 바라보는 친구나, 혹은 내가 하는 고민들을 아예 들을 준비도 안된 친구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 만남이 의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친구들이나 주변 관계로부터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는 나라는 사람이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 지금, 어딘가 쓸쓸하고 고독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고, 나에게 반가움을 표현하는 이 친구들이 참 소중하다고 느꼈으며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이 든든한 사람들이 좋았다. 그래서 사실 내가 그리웠던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다정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내 휴가는 홀랑 지나가버렸다. 나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듯 짐을 챙겨 싱가포르로 돌아왔고, 다시 나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재밌게 열심히 살아서 다시 만날 나의 사람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또 들려줄 것이다. 흥미롭다. 이 관계들과 지나가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가. 휴가조차 나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는 요즘은 살아가는 감칠맛이 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