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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여전히 흐르는 삶 속에서

by 정진우

한번쯤은 써보고 싶었던 주제다. 나는 매일 생각에 빠지고, 감수성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이라 익숙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다.


죽음에 대해 처음 느끼고, 받아들여 본 것은 가까운 누군가의 장례식을 겪으면서부터이다. 당연하게 내 옆자리 한켠에서 머물던 사람을 갑자기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참 어려웠다. 그 개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없고, 갑자기 세상 속에서 삭제된 듯한 그 상황은 휑하고 차가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은 동화의 마지막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을 불현듯이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때로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꼭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기분이다. 죽음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에도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사람의 톱니바퀴를 빼버리고 내 안에 톱니바퀴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톱니바퀴들은 다시 정상적으로 굴러간다. 나는 이런 과정들이 좀 힘들었다. 나의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내 몸이 상황에 적응하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싫었고, 서글펐다.


실제로 주변 지인들의 부고소식이나, 연예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면,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어도 나의 하루는 철렁거렸다. 목구멍 밖으로 넘칠 듯한 미어지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 침을 가까스로 삼킬 뿐이었다.


그럼 죽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삶? 생명? 잉태? 뭐가 맞고 틀리다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현재’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현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에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부터 자신의 일, 매일 굴러가는 일상, 식사, 잠, 풍부한 마음의 교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죽음과 삶에서 초월하여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도, 갑자기 찾아올 그 시점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가를 고민하며 거기서 삶의 이유를 찾는 철학가는 아니다. 다만, 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매 순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끼고 싶다. 세상은 그러기에 충분히 넓고 매 순간 변화하기에. 그리고 매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의 삶이 꽤나, 그리고 썩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못 본 책과 영화도 많고, 아직 못 가본 나라도 차고 넘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심지어 매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곳은 사실 꽤 아름다운 곳이 아닐까? 이렇게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을 우리는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나는 이 ‘가능성’이 기대가 된다. 그래서 나는 살아가고 싶다. 그 기대감은 나를 꽤 신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죽음이 무엇이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른다. 여전히 두려워하는 부분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영원하지 않을 주변사람에 대해서도 말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이겨내어야 하는지도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죽음의 반대편이라고 느껴지는 ‘현재’를 그냥 충실히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보기로 했다. 작은 행복도 느낄 수 있는 맑고 세심한 사람이고 싶고, 언젠가 찾아올 아픔 역시, 그때의 ‘현재’에 충실하게 느끼고 울어내는 것이 죽음 반대편에 있는 삶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림자처럼 언제나 우리의 발밑에 도사리는 죽음이지만, 우리의 멋진 삶이라는 햇빛이 있기에 죽음이라는 그림자도 있는 것이라고 오늘 밤 나는 스스로 정의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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