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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 #4 내일 7시에 버스가 올 거야

DAY 3-4 와라즈/ 여행에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by Sujin

세 시간 남짓 겨우 눈을 붙였다. 아침 일찍 절벽 아래 해안을 따라 난 길을 산책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와라즈(Huaraz)행이었다. 와라즈는 익히 알려진 도시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파론호수(Laguna Paron)와 69호수(Laguna 69)가 있는 도시다. 와라즈는 동선 상 리마를 다시 거쳐 다음 도시로 이동해야 하는 데다가 리마에서 9시간이나 이동해야 해서, 여행을 계획할 때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도시였다. 동화 속 요정이 신비의 묘약을 풀어놓은 것 같은 파랗고 투명한 호수의 풍경에 매료된 나는 결국 가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와라즈에서 2박을 묵기로 했다. 하루는 파론호수를 그다음 날은 69호수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와라즈(Huaraz)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리마에서 출발해서 버스로 꼬박 9시간이 걸려 와라즈에 도착했다. 아침에 출발해 하루 종일 버스에서 보냈다. 전날 충분히 자지 못한 잠은 버스 안에서 줄곧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보충했고, 버스에서 제공하는 (힘겨운) 도시락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우려와 달리 버스는 우리나라의 우등버스와 다를 게 없이 꽤 안락했다.


와라즈에서 묵었던 호텔 주인 할아버지는 푸근하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데스크에서 다음 날 파론호수와 그다음 날 69호수로 데려다 줄 버스까지 한 번에 해결했다. (따로 여행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숙소에서 버스를 예약할 수 있다.) 물론 '마냐나'와 '시에테'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주인 할아버지와 10분가량 서로 답답한 상황을 지속했지만, 인상만큼 인자하신 할아버지는 알아듣지 못해 멋쩍게 웃는 우리에게 끝까지 다정하게 설명해 주셨다. 후에 몇 가지 단어를 익히게 된 우리는 할아버지가 내일(mañana) 7(siete)시에 버스가 너희를 태우러 올 거야, 라는 말을 전달하고 싶어 하셨단 걸 깨닫게 되었다.


El Jacal Hostel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분명 7시 버스라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7시 즈음 버스는 어디선가 출발했겠으나, 와라즈 시내에 있는 숙소의 여행자들을 모두 태워야 하기 때문에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는 언제 올 지 장담할 수가 없다. 버스가 우리를 태우지 않고 지나친 건 아닐지, 사정이 생겨 늦어진 건지 전화해 물어볼 데도 없고(숙소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예약해 주셨는데...),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미에서 여행하려면 이런 기다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제시간에 온 적은 없지만, 안 온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흔히 남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용기 있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유럽이나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용기'있다는 말을 듣진 않는다. 남미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자 다르겠지만,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은 비슷한 듯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인터넷이나 통신수단의 미비함, 치안의 불안정함 등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비행기표를 구입하는 할 때까지 예상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물리칠 용기가 필요했지만, 정작 여행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해하려는 사람보다 선의를 가지고 여행자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타인에 대한 믿음과 설사 일이 틀어졌다고 해도 결국에는 원만하게 해결할 지혜가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면, 여행은 매 순간이 불안과 근심의 연속일 것이다. 물론 믿는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좀 더 선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일이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온전히 그리고 더 많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넓히는 길이라는 걸 나는 또한 번 깨달았다.


파론호수는 해발 4200m였지만, 30-40분이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초급 난이도의 산이었다.
뒤로 보이는 구름과 설산, 그리고 호수의 조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황홀하다.


해발고도는 높았지만 걱정과 달리 고산병 없이 30분 만에 수월하게 정상에 올랐다. 미리 준비한 점심 도시락(빵과 음료)을 먹으며 짧은 자유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참을 달려 숙소가 있는 와라즈 시내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달콤함은 짧고 기다림은 길었지만, 파론호수를 보고 나니 앞으로 마주하게 될 긴 기다림을 설렘과 행복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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