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와라즈/ '69호수'를 걸으며 배운 인생의 한 걸음
이튿날은 새벽 4시에 나섰다. 69호수는 왕복 트레킹만 5시간 이상 소요되는 코스였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했다. 그날도 역시나 어둠과 추위 속에서 한참 버스를 기다렸다. 40분쯤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12인승 미니 버스가 (다행히) 우리를 태우러 왔다.
트레킹을 하기 앞서 아침식사를 위해 어딘가에(?) 내려졌다. 간단한 뷔페가 차려져 있고 단품 식사를 주문할 수 있었지만, 구미가 당기는 건 거의 없었다. 들여다본 메뉴판에 아는 메뉴 Hamburger가 있어 주문했는데, 빵은 차갑고 질겼고 패티는 형편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침잠을 깨워줄 커피만 연신 들이켰다.
맛이 형편없기도 했지만, 69호수 트레킹에 앞서 굉장히 긴장한 탓에 음식을 넘길 수 없기도 했다. 고산병을 심하게 겪었다는 경험담이 10명 중 9명이었고, 체력에 자신이 없던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떤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해서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괴로움과 어지러움과 두통을 참아내야 할까 라는 고민을 등산 직전까지 계속했던 것 같다. 오전 9시에 등산을 시작했다. 초반 코스는 평탄했다. 평원을 유유히 거니는 소 떼와 힘차게 흐르는 물을 지나며, 공간감각과 현실감을 잃었고 긴장감도 잠시 잃었다. 마치 티브이 속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나 평원지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자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등산길 모퉁이에는 여지없이 누군가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앉아 있다. 눈이 마주치면 많이 힘들지, 라는 무언의 동질감을 잠시 나누며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또, 누군가는 앉아 있는 이에게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차나 코카캔디를 건네기도 한다. 다리는 천근만근이었고 점차 허리가 굽어져 땅만 보고 걸었다. 앞사람의 발 뒤꿈치만 시야에 들어왔다. 앞사람의 발이 멈추면 함께 멈춰 섰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내 걸음을 떼었다. 눈으로 열심히 좇다가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그제야 잠시 허리를 펴고 나 홀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닌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속이 울렁거리거나 헛구역질이 나는 심각한 정도의 고산병은 아니었지만, 워낙 고도가 높아 산소가 희박하다 보니 한 걸음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고, 잠시 쉰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마냥, 그저 거친 숨만 골랐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69호수가 있는 정상을 가늠해 볼 수도 없었다. 저 능선을 언제 넘지, 지금부터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르지 못하고 포기할 것만 같았다. 세 걸음 걷고 잠시 멈췄다가, 또다시 세 걸음 걷고 멈추기를 무한히 반복하며, 그저 지금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딛을 수 있다면 내디뎌 보자, 라는 생각뿐이었다.
능선을 넘자 표지판이 69호수에 다다랐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다리에 힘이 실리고 굽었던 허리가 펴지더니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그냥 숨이 가빴겠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땅만 보고 걸었다. 69호수의 모습을 단 번에 한눈에 담고 싶어서 속으로 혼자만의 카운트를 시작했고, 역시나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쫓으며 따라갔다. 그리고 앞 선 이의 짧은 탄성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정상에 위치한 호수에 닿은 것이다.
할 말을 모조리 잃은 기분이었다. 맨 처음 이곳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가늠해보았다.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을 다 담아둔 것 같은 호수와 한 편을 두른 절벽이 만들어내는 자태를 비밀 요새처럼 혼자 간직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을까.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이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담으려 아무리 노력해봐도 실재를 조금도 닮게 담을 수 없었는데, 나는 '눈' 뿐 아니라 코, 입, 귀 모든 오감을 통해 풍경을 보고 있었기에 노력은 무색했다.
갑자기 눈발이 휘날리고 우박도 내린다. 햇살이 비치더니 이내 또다시 우박이 내리며 요란한 날씨가 이어졌는데, 마치 69호수의 요정(?)이 볼 만큼 봤으면 어서 다시 내려가라고 재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풍경만큼이나 날씨도 신비로웠다.
미지의 세계가 주는 '새로움'은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무용하게 한다. 호수에 이르는 그 길과 69호수는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풍경이었고, 감탄과 경이로움 그 이상을 보여 주었다. 천국을 상상하면 이런 모습일까, 자연에 표할 수 있는 경외의 최고치가 있다면 이곳일까, 싶을 정도로 찬란히 푸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 등산을 하거나 긴 여정을 떠나야 할 때, 혹은 숨이 가쁘고 한 발 내딛기도 싫은 어떤 순간이 오면 나는 여지없이 그날의 69호수를 떠올린다. 멀리 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지 판단하고, 그 한 걸음에 집중하는 게 삶의 태도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어떨 때는 지금 이 걸음이 정상으로 향하는 게 맞을까라는 의심도 들고, 그러다 번뜩 내 삶에 목표로 둔 정상이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이렇다 할 목표도 계획도 없이 사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조바심도 난다. 그러나 이 삶 또한 내가 선택한 이미 내디딘 발걸음이었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다. (적어도 나의) 삶에는 정상이 없다. 늘 내가 서 있는 지금 이곳은 옳고, 내딛는 걸음은 모두 옳은 방향으로 향한다. 다만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