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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 #3 리마에서의 첫 날밤

DAY 2 리마/ 남미에서의 첫 도시, '리마'에 닿다.

by Sujin

비행시간 약 20시간, 엘에이에서의 경유(레이오버)를 포함해 인천에서 떠난 지 꼬박 32시간 만에 페루의 첫 도시 리마에 도착했다. 첫 발은 내린 리마는 말 그대로 회색 도시였다. 절벽 위의 해안도시인 리마는 흐린 날이 많은데, 그날 아침도 역시 그랬다. 공항에 도착해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내 이름이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나를 리마의 숙소까지 데려다 줄 터였다. 눈짓으로 내가 스케치북 이름의 주인임을 어필하자 인사(헬로라고 할까? 올라라고 해야 되나?)를 나눌 찰나도 없이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나도 무작정 그를 따라 승용차에 올랐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듯했고, 내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올라'밖에 없었으므로 차 안은 정적만 흘렀다. 불안하고 초조한 나와는 달리 그는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나른한 눈치였다.


리마 공항(Jorge Chavez Int.)에서 미라플로레스에 위치한 숙소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더군다나 로밍도 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유심도 없었기에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남미에 도착한 지 20분도 안돼서 이름 모르는 낯선 이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불안한 생각은 틈을 주면 금세 상상력을 더한다. 내가 이곳에서 missing 돼도,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끼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렸고, 그에게도 들릴까 봐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으로 리마의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출근시간의 도로는 정체였고, 거리에는 양복과 교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시의 정경은 회색으로 더욱 살풍경했다.


무사히 나는 리마의 첫 번 째 숙소 구르메 민박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함께 여행하기로 한 친구들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짐만 맡겨 둔 채 우리는 함께 거리를 나서 환전을 하고, 유심을 구매하고, 간단히 아침 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다음 날 떠날 와라즈행 버스 왕복표까지 구매하고 구시가지를 함께 둘러봤다.


<꽃보다 청춘 - 페루편>에 나왔던 라루차 상구체리아(La Lucha Sangucheira) 샌드위치 가게 (가격은 약 21 PEN)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De Lima)
아르마스 광장의 리마 대성당(Cathedral of Lima)


구시가지를 둘러보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적잖이 놀랐다. 유럽 같은 풍경과 엄청난 인파였다. 구시가지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의 큰 주축들이 늘어서 있다. 직전 연도에 다녀온 스페인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16세기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피사로가 지금의 리마 대성당 주춧돌을 올려, 유럽의 바로크 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신 '와, 여기 유럽 같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는 여행하고 있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유럽의 건축물이 더 고풍스럽다고 여기는 편협한 의식이 담겨있었음을 반성한다.


아르마스 광장의 대통령궁(Government Palace of Peru)
샌프란시스코 수도원(Basilica y Convento de San Francisco de Lima)


더불어 인파가 굉장했다. 페루 시민들인지 관광객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근처 시장에서도 인도를 걷기 힘들 정도였다. 여행하기 이전에 소지품 관리 특히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주의를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인파 때문에 긴장했지만, 이내 긴장이 풀렸는지 과감하게 셀카봉으로 영상을 찍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위험한 행위라는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택시기사 조차도 창을 내린 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지 말라고 말할 정도이니, 자국민도 치안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가장 조심해야 할 여행객은 누가 봐도 신난 깨발랄 모드로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셀카봉에 장착시켜뒀다니. 그 적정선을 잘 찾아야 한다. 과도한 긴장은 그곳에서 봐야 할 것들을 놓칠 수 있고, 완전히 긴장을 놓아버린 상태는 내가 가진 것을 잃을 수 있으니 말이다.


Aycha에서 파는 꼬치(Brochette)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네...?


사랑의 공원(Parque del Amor)의 키스하는 연인 동상


해 질 무렵까지 흐리고 안개 낀 리마의 바다는 밋밋하고 서늘해 아쉬운 노을 풍경이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받아줄 만큼은 적당히 포근했다. 무사히 잘 도착했고, 앞으로의 여행도 끝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을 빌어보았다. 숙소 돌아와 간단히 맥주 한 모금(캔 다 못 마심)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한국에서 일어난 지 꼬박 53시간 만에 청해 보는 잠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다. 비행기에서도 거의 잠을 자지 않았았는데도 잠이 오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영혼의 한 자락만 간신히 붙들려 있는 기분이었다. 수면제를 처방받지 않은 건 자만이었던 걸까. 더구나 다음 날 아침 긴 여행을 떠나야 했기에 충분히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잠을 몰아내고 있었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첫날밤이었다. 결국 나는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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