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1 마추픽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졸린 눈으로 겨우 바나나와 커피를 삼키고 마추픽추로 데려다 줄 셔틀버스를 타러 나갔다. 늘 우리보다도 더 부지런한 여행자들은 어디나 있다. 이 많은 여행자들을 태우고 오늘 안에 마추픽추에 다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비까지 내렸다. 부슬비가 급기야 세차게 내리기까지 해서 급하게 우비도 사 입었다. 다행히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쿠스코보다 해발고도(약 2460m)가 낮아져 증세가 꽤 나아졌지만, 고된 일정에 몸이 무거웠고, 비에 젖은 판초까지 더해지니 더 늘어지고 힘들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셔틀버스는 제 시간마다 출발하며 비에 젖은 여행자들을 착실히 태워 마추픽추까지 데려다주었다. 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르는 버스 밖으로 어디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 모를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보인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데도 충분히 힘든데, 두 발로 그 모든 길을 밟아 오르는 여행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을까.
미리 예약한 여행사의 가이드 깃발을 따라 우리도 드디어 마추픽추에 입장했다. 비의 기세가 줄었지만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갛게 갠 마추픽추를 볼 수 있는 건 꽤나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었기에 안타깝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좋을 순 없는 일이니까. 몸도 힘든데 그냥 내려갈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가이드를 부지런히 따랐다. 안개 낀 마추픽추도 나름대로 신비로운 모습이었고, 안개에 감춰진 그 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즐겁게 하려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 다독임도 잠시. 누군가 입김을 불기라도 한 듯이 안개가 순식간에 물러가며 마추픽추의 그 위용이 드러났다. 서서히 드러난 것도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골짜기 아래서는 여전히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기에 말 그대로 마추픽추는 공중에 떠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잃어버렸던 공중도시라는 부제에 꼭 맞았고, 그제야 공중도시로 들어가는 문이 허락된 것 같았다.
몇 해 전 '꽃보다 청춘'에서 안개에 휩싸인 마추픽추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모습이 드러나자 눈시울을 붉히던 출연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어떤 풍경이 사람을 울릴 수 있을까 내심 그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행은 각자의 서사를 통해 완성된다. 마추픽추에서 눈물짓던 40대의 유희열은 과거 세계 불가사의를 직접 보는 게 꿈이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꿈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며, 마침내 볼 수 있게 된 마추픽추에서 그의 청춘을 함께 지낸 친구들과 여전히 함께 하고 있음에 감격했다고 밝혔다. 그의 잊혔던 꿈, 그리고 함께 여행하는 이들과의 추억이 여행의 서사를 작성하고 있었기에 그곳은 그에게 의미가 있다. 풍경 그 자체만으로 그를 울린 건 아니었다.
물론 마추픽추의 자태만으로도 충분히 신비로웠고, 세계 불가사의 중 한 곳을 오게 되었다는 뿌듯함은 있었지만, 오히려 나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미디어에서 줄곧 소비되었던 이미지를 마주했다는 데서 그 감흥이 그칠 뿐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건들, 아름다운 풍경이 나라는 존재와 만나 하나의 새로운 서사를 작성하고,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가 또다시 나라는 존재를 다듬어 가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스스로에 감동하는 일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애초 기대한 목적은 저버린 채 그저 기진한 육체와 정신을 부추기며 목적지에 깃발을 꽂을 뿐이어서 아쉽게 느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