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 다시 쿠스코/ 여행에서의 감기는 더 독해요
다인실의 호스텔에서 늦잠은 사치다. 부지런한 여행자들의 더 부지런한 새벽 알람이 울릴 때마다 잠에서 깼다. 다시 눈을 감아봤지만 여전히 알람은 계속 울린다. 부지런한 여행자들의 알람이 차례로 울리는 동안에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다. 창밖은 이미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계를 확인하니 고작 아침 8시였다. 여행에서는 해마저도 부지런한 가보다. 그날은 계획한 일정이 없어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났다.
고산 증상은 마추픽추에 다녀온 이후에 한 풀 수그러들었지만, 감기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의 숙소는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고, 마추픽추를 오를 때 비도 흠뻑 맞은 탓이었다. 코 막힘에 숨쉬기가 어려웠고, 기침이 멎지 않아 흉통까지 이어졌다. 숙소에서 약을 먹고 한숨 더 자야 그나마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 거 같아 숙소의 다른 여행객들이 모두 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몸이 아프니 그간 잘 버티고 있던 마음까지도 일시에 무너져 내릴 거 같았지만, 고작 매트리스만 겨우 가린 커튼을 치고 그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숙소에 홀로 남게 된 걸 확인 한 그제야 울음을 토해냈다. 아니 울음이 토해졌다. 못난 불안은 마음에 열을 냈고, 감정을 토해내기 위한 눈물이 흘렀다. 마음도 감기에 걸린 것이다.
불안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내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느끼며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패닉이 온다. 그 패닉의 상태가 어떠한 지 종종 질문을 받곤 하는데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불안으로 가득 찬 얼음 안에 갇힌 기분이 든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풍경은 여전하지만, 갑자기 그 현상들이 왜곡되어 보이고 소리마저도 굴절되어 잘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누군가 와서 얼음을 녹이고 나를 꺼내주길 기다리면서도, 얼음이 기화되면서 밖의 공기마저도 불안이라는 독가스로 전염될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경계하게 된다. 가장 최악은 영원히 이 차가운 얼음 속에서 탈출할 수 없을 거 같은 처연한 기분이 든다는 거다. 불안에 한 번 갇히게 되면 속절없이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날도 눈물이 얼음을 녹일 때까지 한참을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슬슬 배가 고프다. 어쩌면 배고픔의 온도가 얼음을 가장 빨리 녹이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울었으니 오늘은 정말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맛이 없어서 간단하게 샐러드를 먹으러 갔다. 화려한 꽃 장식을 올린 연어샐러드였는데, 쿠스코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신선한 요리였을 거 같다. 물론 맛도 좋았다.
오후 3시가 넘은 참에 퉁퉁 부은 얼굴로 첫 끼를 시작했는데, 잠시 뒤 잘생긴 종업원이 다가와 음식이 어떤지 물었으며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그 당시 할 줄 아는 스페인어가 거의 없었고, 음식은 무조건 리코(Rico)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어 'Todo Bien (Everything is fine)'이라고 답했다면 좋았을 거 같다. 물론 나는 fine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한껏 감정을 소비 덜어냈고 (물론 운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않는다는 건 나도 안다), 맛있는 식사와 다정한 인사말을 건네받은 그 순간만큼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다시 씩씩해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나니 기운이 생겨 쿠스코의 골목을 누볐다. 쿠스코는 90프로 이상이 잉카인들의 후손인 인디오들인데, 그들의 복색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든다. 그뿐인가 그들은 마치 강아지라도 산책시키듯 새끼 양(라마나 알파카일 지도...?)을 줄에 매어 데리고 다니기도 한다. 또, 돌담으로 세워진 좁고 복잡한 돌길과 그 위에 보란 듯이 세워진 스페인 양식의 건물들, 광장을 가득 메운 여행자들과, 여행자들만큼이나 많은 호객꾼들과 골목 곳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상인들이 그리는 쿠스코의 풍경은 다소간 어지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광풍의 역사 속에서도 파괴된 돌들을 주춧돌 삼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 생기 넘치는 골목을 걷고 있으니, 내 마음에 잠시 머무는 감기는 너절하게 느껴진다. 과거 잉카 제국 때엔 케추아인들이 이 골목에서 직접 짠 옷을 팔고, 농사 진 감자를 쪄 가지고 나왔겠구나 상상하면서 걷는다. 내일은 감기가 한결 나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