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무지개산 비니쿤카
이전 날 쿠스코에서 충분히 쉬었지만, 역시나 일찍 일어나는 건 무척 힘들었다. 그날은 무지개 산이라 불리는 비니쿤카 투어였는데, 비니쿤카는 쿠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당시(2019년 말)만 해도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관광지였고, 해발미터는 5000미터로 이전의 69호수보다도 높았다. 여전히 몸이 무겁고 감기 증상도 떨어지지 않아 걱정이었지만, 역시나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각에 투어 차량에 탑승했다.
약 2시간 반 정도 이동해 아침식사를 하고, 트레킹에 나섰다. 트레킹 시작부터 해발 고도가 높았지만, 다행히 고산에는 많이 적응한 모양이었다. 초반의 완만한 트레킹 코스를 지나면, 원주민들이 말을 데리고 관광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니쿤카는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부터 말을 타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보통 생각했던 말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았다.(고산지역에서는 말도 크기가 작은 걸까? 아니면 당나귄가?) 내가 너무 무겁지 않을까 미안할 정도로 날씬한 흰색(+검정 갈기) 말에 올라탔다. 가격은 50솔로 그 당시 환율로 약 17000원 정도였다. 만 7천 원에 편히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니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긴장도 했지만 이내 적응했다. 올라가는 데 힘이 덜 부치니 풍경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말을 끌어주는 원주민의 발이 얼마나 빠른 지 분명 해발 4500미터가 넘는 고산지역인데, 내 무게까지 더해진 말을 이끌고 이렇게 빨리 걸을 수 있다니 신기했다. 그 길을 하루에 얼마나 왕복할까? 연신 말을 향해 VAMOS(바모스, 가자)를 외치며 재촉한다. 미안해, 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서.
말을 타고 40분가량 올라간다. 그 후 말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점에서 내리는데, 그때부터가 진짜다. 전망대까지 바로 코 앞인 거 같지만 경사가 매우 가팔라서 난이도가 상당하다. 게다가 나는 감기로 코가 이미 꽉 막힌 상태라 가뜩이나 숨쉬기도 더 어려웠다. 무호흡 등반이었다. 찬 바람에 더 이상 머물 곳 없던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69호수 오를 때 세 발짝에 한 번 쉬웠다면, 비니쿤카 마지막 코스는 한 발짝도 어려웠다.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해서 전망대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말을 타지 않고 걸어올라 온 다른 친구들 보다도 더 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말을 타지 않았다면, 어쩌면 제 시간 안에 전망대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전망대 뒤로 형형색색의 무지개산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보는 무지개 산도 충분히 멋있었지만, 나는 말 위에서 봤던 풍경이 훨씬 좋았다. 역시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풍경도 더 잘 즐길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멋진 사진을 담으려고 고군분투하며 40분가량 머물렀다. 내려갈 때는 오를 때 그렇게 힘들었던 오르막이 내리막이 되어 조금은 수월했다. 다시 말에서 내렸던 지점에 이르렀는데, 올라올 때 탔던 말 아저씨가 나를 알아봤는지 다가왔다. 내려갈 때도 같은 말에 올라탔다. 오를 때는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더니, 내려올 때는 내가 마지막 손님인 듯 천천히 걸었다. 역시나 걸어 내려간 친구들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비니쿤카는 남미여행을 통틀어 가장 힘든 여정으로 기억하게 됐다. 혹 누군가가 (고민 많은 표정으로) 비니쿤카를 꼭 가야 될까?라고 묻는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답할 거 같다. 비니쿤카가 별로 여서도 여정이 무척 힘들어서도 아니다. 여행서 반드시 가야 하거나 해야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해서다. 가고 싶지만 체력적/경제적 여유가 받쳐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거고,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꼭 보겠다 싶으면 그냥 갈 뿐이다. 페루까지 갔는데 비니쿤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단언이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나온 거라면, 더욱이 그 여행의 의미는 퇴색될 수 있다. 아, 그때 거길 갔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지만, 아쉬움으로 남겨두는 것도 여행의 일부이고, 전혀 의미가 없지 않다. 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피츠로이라는 산에 오르길 포기한 아쉬움이 남아 3년 만에 다시 아르헨티나를 찾았을 때 무조건 피츠로이에 올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두 번째 기회에도 정상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쉬움보다는 몸의 컨디션을 우선한 내 선택을 존중해 오히려 인연이 아닌가 보다 가벼이 생각하게 됐다. 후회나 아쉬움은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일 수 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직진하고 싶은 곳이 세상에 더 많다는 걸 안다. 그리고 반드시 닿아야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가면 된다. 누군가가 이번엔 비니쿤카 가길 잘한 거 같아?라고 묻는다면,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