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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 #10 마추픽추로 향하는 길

Day 10 잉카레일을 타고

by Sujin

나는 기차를 좋아한다. 기차 타고 시골로 내려갔던 어린 시절의 흔한 추억도,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와의 설레는 기억도 없으면서, 기차라는 단어는 묘하게 낭만적이고 맥락 없이 설렌다.


기차를 타고 싶어서 여행지를 선택할 때가 왕왕 있다. 또 기차 안에서 읽을 책과 볼 영화 고르는 일도 좋아한다. 그래서 군산에 자주 내렸고, 내려가는 길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봤다. 남미 여행을 앞둔 내가 생각났다면서 친구가 선물해 준 책 <힘 빼기의 기술>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기차 타고 내려 간 제천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차 편을 알아보다가 또다시 기차를 예매해 예정 없던 동해로 혼자 떠나기도 했다. 스무 살에 첫 여행으로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도는 내일로를 선택한 데도 기차가 너무 타고 싶어서였다.


기차가 좋다. 정해진 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점. 약속된 정거장에 반드시 정차한다는 점. 약간의 소음과 흔들림이 미묘한 안정감을 준다는 점. 그 일정하고도 안정된 떨림이 내 안의 가슴 떨림이 아닌가 착각하는 일도 그리고 그 설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혼자여도 외롭지 않다는 점. 누군가와 함께 일 때면 내 어깨를 빌린 누군가의 머리를 툭하고 떨어트리지 않고 오랫동안 가만히 놓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창 밖으로 보이는 영상 같은 풍경도.


그러나 정작 기차에 관해서는 힘들었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독일의 뮌헨으로 넘어가는 야간열차의 좁은 침대칸에서 밤을 보내던 스물셋 겨울날, 엄청난 불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둠으로 가득 찬 창문 밖 화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고, 그 기차는 동이 틀 때까지 정차하지 않을 터였다. 그 당시 나는 좁은 침대칸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일종의 폐소 공포증이 아닐까 하고 여겼다. 공황장애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던 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도 왕왕 그런 경험을 했지만 대부분 자리를 벗어나 잠깐 휴식을 취하면 금세 괜찮아지곤 했다. 그러나 그날 기차는 아주 긴 시간 어둠 속을 달렸고, 영영 밖이 밝아지지 않을 거 같고, 기차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그 두려움은 오랫동안 기저에 남아 있었다. 훗날 비슷한 증세가 자주 일어 결국 병원을 찾았을 때,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임을 알게 됐다. 내 증상은 내 의지대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발현했다. 당시 나는 주로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 증상이 나타났는데, 내리고 싶어도 버스가 터널에서 정차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증상이 발현되는 식이었다. 버스가 터널을 지날 때면 늘 그날로 돌아가 어김없이 야간기차를 탄 채 어둠을 지났다. 삶 자체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둔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기차 타는 게 좋았고 설렜다. 남미 여행에서 몇 안 되는 기대되는 것 중 하나도 잉카레일을 타는 거였다. 물론 내가 기대한 여유로운 분위기가 아닌 시끌벅적하고 모르는 누군가와 마주 봐야 하는 테이블 구조이긴 했다. 그래도 대부분 마추픽추로 향하는 달뜬 여행자들이 뿜어내는 즐거운 에너지의 소란스러움이었고, 짧은 시간 동안 그 달뜬 얼굴을 한 낯선 이들과 마주 보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게 느껴졌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어두운 터널을 달리다가 갑작스레 밝은 곳으로 빠져나와 눈뜨기 어려운 당혹스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내 상태가 갑자기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야 할 것 같은 괜스레 밝고 더없이 해맑은 미소의 달뜬 여행자와 같은 표정을 내 얼굴에도 장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랬다. 나 역시도 마추픽추로 향하는 길이고 기차라는 단어에 설렜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불안과 그와는 별개의 설렘이 혼재하는 마음에 어지러웠다. 불안과 즐거움, 어두움과 밝음의 낙차가 클수록 그다음 불안과 어두움이 더욱 짙어져서 일부러 지금의 즐거움과 밝음을 지나치게 의식해 피하고 있진 않았을까. 정작 짙은 어둠일수록 여명이 더 강하게 밝아온다는 걸 깨닫지 못한 때였다.



약 2시간을 달려 마추픽추역에 내렸다. 우습게도 덩달아 들떴던 마음이 역에 내리는 순간 가라앉았는데, 엄청난 호객꾼들이 이미 승강장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을 상시 복용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힘들었다. 마추픽추라는 고고한 잊혔던 공중도시를 떠올렸고, 그렇다면 굉장히 한적하고 고요한 마을에 내릴 거라고 상상했지만, 그곳은 빈틈없는 관광지였다. 기차는 끊임없이 여행자들을 쏟아내고, 그 여행자들을 배 불리고 재우는데 온 마을이 힘쓰고 있었다.


우리는 호객꾼들과 기차에서 내린 인파를 뚫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이미 여행사의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기차역과 조금 떨어진 (동네 자체가 워낙 작아서 그렇게 멀진 않다. 다만 좀 어두울 뿐.) 허름한 호스텔이었다. 우리가 선택했던 패키지로 이미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그 호스텔을 묵어 갔을 테고, 기차 도착 시각도 늘 똑같기에 우리의 도착 예정시각을 알고 있을 텐데도, 전화하라는 쪽지가 걸린 채 호스텔 문을 굳게 닫혀있었다. 한참 뒤 돌아온 직원과의 여전히 미숙한 소통, 그리고 최악의 룸 컨디션(너무 춥다)까지.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편히 뉘일 수 있는 마을이 (내게는) 아니었다.



어둠을 지나 밝은 곳으로 나온 줄 알았던 기차가 다시 터널에 갇혀버린 듯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잠시 잊어버렸다. 아, 맞다. 나 마추픽추 보러 왔지. 내일 마추픽추를 보면 기분이 달라질 거야! 왜냐면 마. 추. 픽. 추.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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