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8 달의 계곡과 별똥별 투어
산 페드로 아타카마에 내렸다. 작열하는 태양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모자를 쓰지 않으면 두피까지 태울 정도였다. 보통 지낼 숙소는 2-3일 전에 예약하곤 했는데, 이때는 우유니에서 정신없이 투어를 소화하기도 했고, 또 지난 2박 3일 사막 투어 동안 인터넷을 전혀 할 수 없어서 숙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로 왔다. 게다가 볼리비아에서부터 유심도 없이 지내고 있는 중이라 와이파이가 절실했다. 피곤이 너무 오래 누적된 상태라 곧장 눈앞에 보이는 호스텔로 들어갔다. 하루만 묵을 예정이어서 컨디션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빈방만 있다면 그대로 짐을 풀 작정이었다. 다행히 동행하는 친구들과 다 같이 묵을 수 있는 다인실 방과 작지만 해먹과 파라솔이 있는 정원이 마음에 드는 호스텔이었다.
숙소 들어와 드디어 3일 만에 인터넷에 접속을 했다. 제일 먼저 접한 소식은 한 여자 연예인의 사망 소식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지극히 사적이어야 했을 연인 간의 관계가 사회면에 등장했고, 고통받는 모습이 대중에 고스란히 공개되어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웠던 사람이었다. 나조차 심란해진 마음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이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위로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십 대 중반 첫 에피소드를 겪었을 때, 12층인 우리 집 창밖을 내다보기가 두려웠다.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나 스스로를 못 믿는 불안의 상태까지 이르러 방 창문을 모두 잠가버린 일도 있었다. 닫힌 창문만큼이나 마음의 문도 굳게 닫혀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고통스러웠다. 6년을 이어오던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 한 때도 바로 그때였다.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았고, 가장 친했던 관계도 놓아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럴수록 모든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뿐이었지만, 내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자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스스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여긴 그때 내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무리 물속에서 발버둥 친다고 해도 나 같은 겁쟁이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으면 그저 계속 발버둥에 힘만 뺄 뿐이었다. 바닥의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을 것 같았는데, 발버둥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서자 발이 닿는 깊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닥을 짚었으니 살짝만 발을 굴러도 수면 위로 오를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결국에는 그 깊이는 내가 만들어 낸 거였다. 물론 두 발로 서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안다. 분명 바닥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전히 고꾸라질 거처럼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발버둥마저 힘에 부쳐서 침잠하다 우연히 바닥에 닿을 때도 있고, 고맙게도 누군가가 손을 잡아줘 일어날 때도 있었다. 여행 당시는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계속 침잠하던 힘든 때였지만, 묘하게 삶의 애착을 일깨우는 순간들도 많이 있었다. 나는 소금 사막을 보러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은하수를 보며 슬프다가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별똥별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아타카마 사막으로 투어를 나갔다. 지형이 달의 표면 같이 울퉁불퉁한 굴곡을 만들어 내서 달의 계곡이라고 불린다. 아름다운 일몰로도 유명하다. 붉은 노을이 덮인 사막의 계곡을 발밑에 두고 섰다. 노을의 명암이 지자 계곡의 골이 더 깊어졌다.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다라는 교과서의 한 줄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사막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여행 동선에 맞춰 잠시 들르는 곳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일몰을 마주하자 감동이 밀려온다. 이 한 풍경을 보기 위해 그 힘든 시간들을 견디고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평생 잊히지 않는 단 하나의 풍경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길 바랐다.
그날 밤에는 별투어를 나갔다. 사막 한복판으로 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천체기구가 마련된 관측소 같은 곳이었다. 불빛 한 점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서 카메라를 꺼낼 생각조차 못했다. 망원경으로 화성, 토성, 목성을 봤다. 다행히 우리가 여행한 때는 그믐이라 육안으로도 별들이 잘 보였다. 관측소의 모든 불빛을 전부 소등하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가득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쏟아지고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함께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탄성을 자아냈다. 별똥별을 발견한 거다.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눈에는 별똥별이 안 보였다. 선택된 누군가에게만 보이는 걸까. 모두가 서너 개씩 발견할 때 까지도 나는 별똥별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킬 때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쫓았지만 보기가 쉽지 않았다. 별을 쫓으면 이미 떨어지고 난 뒤라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나만 보지 못하고 투어가 종료될까 봐 초조했다. 차라리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곳으로 떨어지길 기다리기로 전략을 바꿨다.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기다리자, 별똥별 하나가 옆으로 훅 하고 떨어졌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확실히 별똥별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또 다른 별똥별이 하나 더 떨어졌다. 쫓을 때는 늘 한 템포씩 늦어 놓쳤지만, 역시 마음을 비우고 한 곳에서 차분히 기다리니 만날 수 있었다. 물속에서 힘을 빼고 충분히 침잠하자 발이 땅에 닿았던 그때처럼.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데, 막상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안 든다. 별똥별 소원 접수처가 있다면, 제일 많이 들어오는 내용은 ‘저거 지금 별똥별 맞아?’이지 않을까. 결국에는 별똥별을 두 어 개 본 후 하늘에 대고 무작정 소원을 들어달라고 빌었다. 내가 본 건 별똥별이 맞으니까 지금이라도 들어달라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달리 다른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리 소원을 준비했더라면 다른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해 주세요 같은. 그 순간에 생각난 게 뻔하디 뻔한 행복이라니.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늘 가질 수 없는 존재처럼 소원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걸까. 만약 지금 그 소원을 수정할 수 있다면 이렇게 빌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이라는 걸 늘 잊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여느 때처럼 행복이 뭘까 쫓던 그날 밤의 소원은 그랬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도록 바라는 일.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