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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May 25. 2023

[책 리뷰] 순수한 여인 테스

16년 만에 다시 읽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 과제 때문이었다. 국어가 아닌 미술 과제였는데, 고전 소설 한 권을 택해 읽고 느낀 감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제였다. 우선 열일곱에 나는 테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테스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과거(결코 사랑한 적 없고, 사랑하지 않을 남자에게 당한 강간)를 고백했고, 에인절은 그 고백에 순결한 여인인 줄 알았던 테스에 대한 사랑이 불시에 식어버린다. 시간을 갖자며 떠난 에인절을 절절하게 기다리며 끝까지 사랑고백을 놓지 않는 테스를 어떻게 열일곱의 소녀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랑에 목메는 어리석은 여자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테스와 에인절이 사랑했던 그 시간의 환희를 찬란한 무지개 빛으로 그리되, 그 위에 지워지지 않을 그녀의 불행(가난한 가정 형편,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죄책감, 알렉과의 과거, 그리고 아이의 죽음 등)을 검은 멍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작품 발표 끝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도(나중에 에인절이 돌아오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를 믿고 기다리는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내 발표를 듣고선 미술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해주셨다.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 삶에서 사람이 나오고, 사람은 곧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단어의 발음과 형태가 비슷한 것만 봐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을 것이며 삶과 사람,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영어에 살다(LIVE)와 사랑(LOVE)의 형태가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의 예다.


선생님은 칠판에 크게 '사랑'과 '삶'을 크게 쓰시며, 열정적으로(나는 그렇게 느꼈다) 설명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내 얕은 감상을 과하게 지적하신다는 느낌을 받았고,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거 같아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이 십오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그 미술 선생님을 (굉장히) 싫어하게 됐지만, 내게 창피(당연히 그럴 의도는 없으셨다)를 주신 것과는 반대로 해당 미술 과제는 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 그림은 여전히 내 방 한편에 걸려있다. 창피를 당했다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 중 미술실기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게 그때가 유일해서 오랫동안 그 그림에 양면의 감정을 가졌다.


20대를 지나며 나도 몇 번의 사랑을 하고, 삶이 휘청거리기도 하고 단단해지기도 하면서 점차 어른이 됐고, 어느 날 불현듯 열일곱의 나에게 선생님이 해주시려던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미술 선생님은 머리가 하얗게 센 오십이 훌쩍 넘은 남자분이 셨는데, 열일곱의 소녀가 사랑이 인생에 꼭 필요한지 의문을 가졌을 때 얼마나 귀여워 보이셨을까. 사랑이 어떤 존재인지를 언젠가 깨닫길 바라시는 마음이셨겠구나 이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언젠가 다시 <테스>를 읽어보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테스>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고전 소설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어렵다. 문체도 쉽지 않거니와 시대와 종교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읽으면 아무래도 많은 부분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뜩 <테스>를 다시 읽으며 과거 발표시간에 내가 도대체 왜 부끄러워졌는지, 또 선생님이 그 책에서 내가 뭘 느끼길 바라셨는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려 16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집어 든 것이다.



내가 과거에 읽었던 소설이 과연 <테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소설이었다. 우선 나는 사랑의 기쁨을 무지개색으로 바탕 전체를 칠했는데, 그녀에게 사랑이 주는 환희의 시간은 에인절과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결혼한 그날 저녁까지 굉장히 짧은 데에 비해 내가 그 감상을 지나치게 크게 그렸다는 데서 좀 놀라웠다. 그녀의 삶은 대체로 어두웠고, 에인절을 사랑하게 됐을 때도 자신의 과거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표현하고자 했던 바에 의하며 바탕이 검은색이 됐어야 했을 정도로 테스 삶의 행복이라곤 없어 보였다.


또, 테스가 남자에게만 의지하는 수동적인 여자라고 비판(?)했었는데, 다시 읽어 보니 테스는 강인하고 자존심도 강하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아는 여성이었다. 알렉에게 유린당하지만 당시 관습에 따라 그의 부인이 되기보다는 홀로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을 한다. 또 세례 받지 못한 아이에게 홀로 세례를 내려주는 모습,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모습, 힘든 상황에도 결코 시댁에 손 벌리지 않는 자존심, 소식 없는 에인절에게 화가 나 모진 소리를 퍼붓는 모습 등. 테스는 내가 생각하던 수동적인 여인이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토록 기다리던 에인절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살인자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살아진다는 소설의 결말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놀라운 결말이었다.


테스가 한심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십 대의 어린 내가 귀엽게 여겨진다. 사랑 경험이 전혀 없던 학창 시절의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내 삶에 들이는 일이 삶 전체를 흔들고, 때론 전혀 다른 삶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이 소설이 가진 시대적/사회적 배경과 한계를 차치하고선 인간이 가진 한계성만 두고 보자면, 어떤 사람도 어떤 삶도 온전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끝까지 에인절만을 사랑하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알렉과 재혼한 테스, 본인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며 목회자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지만 테스와 재회하자 또다시 집착하는 알렉, 이중적 잣대로 테스를 떠났다가 다시금 그녀를 잊지 못해 돌아오는 에인절. 누구 하나 완벽하지 않다. 서로의 마음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서로의 부족을 채우기도 하고, 함께임에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의 존재를 인식하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게 또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린 나와 만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한대도 미래에 사랑에 아파하고, 오랫동안 힘들어했고, 또 오랫동안 누군가를 그리워할 거라고 미리 말해주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면 여전히 미술실 칠판에 앞에 서서 얼굴을 붉히며 서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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