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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Apr 24. 2023

5만 원짜리 위로

신점을 보다

이 글은 2021년 6월 24일에 쓰였습니다.




어제 점을 보러 다녀왔다. 신당으로 차려진 점집은 처음이었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이런 걸 믿지 않고 신도 안 믿으면서, 나를 지키는 조상신이 있다고 하는 무당한테 내 운명을 물어보러 갔다니 너무 웃기다. 이런 내가 무당까지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앞 길이 막막해서였겠지. 


부채와 방울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점괘는 좋은 팔자라 걱정할 필요도 점을 볼 필요 없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버나요? 돈을 좋아하고 잘 써. 연애는 할 수 있나요? 좀 까탈스러운데 내년 3월이면 그래도 마음에 차는 사람이 생겨. 결혼은 하나요? 두 번 결혼할 팔자긴 한데, 최대한 늦게 하면 괜찮아. 가족들은 어떤가요? 다들 평안해. 회사 일은 어떤가요? 새로운 일을 맡을 거야, 아주 잘한 선택이야. 본인이 잘 해낼 거야. 무난한 점괘였다. 크게 흥하는 일도 크게 안 좋은 일도 없어 평안하니, 나중에 궁합이나 보러 오라고 덧붙이셨다. 


점쟁이의 말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주말에 점을 보고 왔다고 직장 동료에게 말하자, 내가 낸 복채에 반만 주면 내가 원하는 위로를 그 보다 더 열심히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점 따위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잘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말과 함께. 나를 믿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스스로도 믿지 못했으면서, 무당이 팔자가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믿다니. 어쨌든 무당이 말하는 내 사주팔자는 꽤 괜찮고, 지금 가고 있는 길도 좋다 했다. 다행이다. 결국에는 앞 날 걱정할 필요 없다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 찾아간 거였는데, 원하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좋은 팔자와 별개로 결국에는 행동을 하는 것은 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무당이 말한 대로 내 팔자는 좋은 게 맞았네라고 할 수 있으려면 나는 무언가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려는 선택과 실행에 주저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5만 원짜리의 위로를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미루고 미루던 일들을 해내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지금은 23년 4월 24일. 신점을 본 지 2년 여 흘렀다. 같이 점을 보러 갔던 친구는 무당이 예견한 올해 결혼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점괘대로라면 작년 3월에 연애를 했어야 했는데, 그 흔한 썸도 없었고 여태 혼자다. 또,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맡은 건 분명 잘한 선택이라 했는데,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됐다. 내 능력과 별개로 회사는 점차 기울었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퇴사를 했다. 너무 힘든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훌쩍 외국으로 떠났다가 반년을 지내고 이제 한국으로 들어온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다시 명백한(?) 백수가 됐다. 분명 내 팔자는 아주 평안하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가 평안한 건지 엉터리 무당이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막막한 마음에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러 가고 싶다. (이번에는 다른 무당을 찾아야겠지!) 안 맞는 거 뻔히 알면서 다시 한번 더 5만 원짜리 위로를 얻고 싶다. 물론 그 이전의 선택은 너무나 후회스럽고 결과는 비참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좋은 팔자를 타고 났다는 말을 듣고 싶다. 앞으로 잘 될 테니 그냥 선택하고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시네. 아, 그 사이 복채 물가도 올라서 이제는 7만 원짜리 위로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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