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3 토레스델파이네 삼봉 트레킹 실패/포기?
다음 날도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을 찾았다. 전날은 버스로 계속 이동하고 내리면서 가볍게 둘러보았다면, 그날은 당일치기 트레킹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은 길게는 10일이 걸릴 정도로 넓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한 코스만 딱 떼어 왕복할 수 있다. Mirador Base Las Torres 전망대에서 삼봉이라 불리는 세 개의 봉우리(Torre Sur, Central, Norte)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코스였다.
이 투어도 숙소 픽업과 트레킹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투어사와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물론 투어사 없이 직접 이동할 수도 있다. 아침 6시 반에 시내에서 출발하여 2시간가량 달려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국립공원 입장 신청서를 제출하고, 여행자 웰컴 센터를 지나 트레킹을 시작한 때는 아침 9시가 약간 지난 시각이었다. 전날 굉장히 추웠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똑같이 껴입었다. 바지 세 겹 그리고 상의 다섯 겹.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햇살이 뜨거워 걷기에 다소 덥기도 했다. 역시 산에서의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순수하게 트레킹으로 걷는 시간만 왕복 9시간이고, 쉬운 코스도 아니라고 했다. 평소 등산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체력도 좋은 편이 아니라 트레킹에는 영 자신이 없었지만, 정신력이나 깡다구는 꽤 있는 편이 아닌가 남몰래 자부했던 것도 같다. 가장 걱정했던 페루의 고산 69 호수 트레킹도 평균 소요 시간보다 빠르게 다녀오지 않았던가. 동행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또 봐야지라는 마음가짐이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게다가 초반 40분가량은 평지에 물도 흐르고, 물 위로 난 크고 작은 징검다리, 흔들 다리를 건너며 꽤 신도 났다. 투명한 물과 초록 나무들에 햇살이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풍경들이 앞다퉈 빛나며 눈부셨다.
평원을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하자, 투어사의 인솔 가이드가 선두에 서고, 그 뒤 약 15명가량의 참가자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보조 가이드가 무리의 꽁무니에서 따랐다. 초반에 나는 무리 중간에 속해 있었는데, 본격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차 뒤로 처졌다. 가이드의 '할 수 있다' 응원을 받을 때마다, 가짜 파이팅을 짜내며 겨우겨우 걸었다. 그런데 한 30분이나 올랐을까. 몇 번이나 가이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앞 무리와 내 거리가 많이 벌어지자, 가이드는 트레킹 중단을 넌지시 권유했다. 전체를 보살펴야 하는데, 홀로 뒤처진 나를 전담으로 케어할 수 없었을 거라 이해한다. 무엇보다 전문가가 보기에 이 속도라면 전망대를 찍고 제시간에 하산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도 같다. 게다가 내 얼굴에서 이미 잃어버린 완주의 의지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누군가가 응원이 아니라 이쯤에서 그만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다.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나는 트레킹을 멈추고 홀로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페루의 69 호수 트레킹에 비하면, 그만큼 힘들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전 트레킹과 다르게 앞으로 남은 거리가 상당했다. 벌써부터 힘든데 남은 8시간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거 같았다. 애초에 삼봉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까닭도 크게 작용했다.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갈 수 있는 데까지 오르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결론적으로 안전을 위한 옳은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 홀로 내려왔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트레킹 코스에서 약간 벗어난 개울이 흐르는 작은 공터에 가 앉았다. 거기서 잠시 울었다. 그동안 꾹꾹 눌렀던 자괴감이 터져버렸다. 바닥난 체력과 의지에 대한 자책, 더불어 그동안 마음을 돌보지 않고 강행군의 여행을 밀어 부친 미안함도 몰려왔다. 게다가 부실해진 마음은 고작 이 트레킹도 완주하지 못하면서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는 식의 자괴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했다. 그러기도 잠시 눈앞의 풍경은 여전히 눈부셨다. 무연히 바라보고 있으니, 이 풍경만으로도 괜찮은 게 아닌가 마음을 다독이게 됐다.
처음 웰컴센터에서 나와 트레킹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바로 눈앞에 삼봉(사실 삼봉 중에 두 개의 봉우리만 보임)이 보였다. 여기서도 잘 보이는데 금방 올라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산 아래서 볼 땐 분명 보였는데, 산속에 들어가니 자취를 감췄다.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갈수록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꼭 가까이서 볼 필요가 있을까. 내려가도 삼봉(이봉이지만)은 충분히 보이고, 지금 이 풍경도 충분히 아름다운 걸. 스스로와 합의를 끝냈다. 나는 늘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의 아름다움에 대해 상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성격의 양면이기도 한데, 손에 닿지 않는 포도를 신포도로 여기거나, 애초에 그곳에 포도가 있었다는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한다. 노력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게 양심이 찔린다. 앞서 고백했듯이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몸과 마음의 관심을 다른 곳(주로 인생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으로 돌리며 주위를 분산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애초에 나는 삼봉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가지 못하게 됐으니 애초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여겨버렸을까. 역시나 포도나무 아래 여우가 된다.
어쨌거나 그때도 공터에 앉아 한참을 울고,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리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아쉬움을 덜고, 자괴감도 털어버렸다. 그동안의 피로 누적으로 체력이 도무지 따라 주지 않는 걸 어쩔 수 없고, 괜히 무리했다가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게 더 후회할 선택이었다. 그렇게 다소 밝아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은 되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의 짐도 다소간 털어 버린 듯하다. 모든 것을 꼭 다 볼 필요는 없다. 집착하지 말자.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서도 너무 욕심내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들을 하니 마음이 가붓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시 웰컴센터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곳은 카페테리아를 겸하고 있어서 사람들도 많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문제는 데이터가 전혀 안된다는 것이었다. 투어사 차량을 타고 돌아가려면 일행들이 전부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웰컴센터로 돌아온 시각이 오후 12시였는데, 일행들의 복귀 예상시각은 오후 7시였다. 장장 7시간 동안, 데이터도 없이 어떻게 버틸지 암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핸드폰에 넷플릭스 드라마 몇 편을 다운로드해 놓은 것이다. 이승기, 배수지 주연의 <배가 본드>였다. 일전에 푼타아레나스의 한국사장님이 계셨던 초밥집 티브이에서 방영 중인 <배가본드> 1회를 시청했다. 그 후 숙소에서 쉴 때 몇 편을 봤었고, 데이터가 없는 지역을 이동할 때를 대비해서 오프라인 저장해 뒀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7시간을 다 채울 만큼은 아니어서 아주 공들여 천천히 봤다. 중간중간 끊어가며 아껴봐서일까 무척 재밌게 봤다. (근데 시즌2를 암시하듯이 끝내놓고, 시즌2 왜 안 주냐…?) 드라마를 다 봐도 7시간을 다 채우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혹시 일행을 마주치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 핸드폰 배터리를 아껴야 했다. 그 뒤에는 정말 그냥 망연히 앉아있었다. 한차례 울고, 또 남은 여행을 어떻게 할지 한참 생각했는데, 또다시 생각하기 싫어서 머리 비우는 연습을 했다. 물론 머리를 비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며, 머. 리. 를. 비. 워. 보. 자. 글자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게 새겨지는 체험이었다.
오후 6시쯤 주차장으로 나가보니, 버스 기사가 차량의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하산할 시간이 되었나 보다. 버스에 탑승해 마지막 여행자가 탈 때까지 또 한참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엉켜있던 마음의 타래를 풀고 비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페루 69 호수에서는 내딛을 수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마지막 한 걸음을 돌릴 줄도 알게 되었다. 꼭 행복을 위해 떠나온 건 아니지만 행복하지 않은 순간들만 무겁게 가라앉고, 어째서 즐거웠던 순간이나 황홀한 풍경들은 홀홀히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걸까. 이 아쉬운 마음들은 아직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걸을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