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5-26 엘 칼라파테_모레노 빙하 투어
El Calafate(엘 칼라파테)에 오니 컨디션이 많이 회복됐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투어가 없었고, 버스 이동 시간도 길지 않았다. 또, 춥긴 했어도 그동안 겪어온 극한의 날씨는 아니어서 견딜 만했다. 음식도 입맛에 맞았고, 혼자 방을 쓴 이후로 꽤 푹 잤던 거 같다. 게다가 직전에 토레스델파이네 트레킹을 포기하며 자괴감에 울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마음을 좀 내려놓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글은 3년 반 전에 다녀왔던 엘 칼라파테에 대해 쓰고 있는데, 올 1월에도 엘 칼라파테에 다녀왔다. 두 번이나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브런치에 연재하는 것 보다도 먼저 또다시 다녀오게 될 줄이야. 두 번째 방문에 가장 놀란 건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랐다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도 페소 가치의 하락과 물가 상승에 관해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여행자 물가도 상상 이상으로 올랐다. 그때도 페루, 볼리비아에 비해 아르헨티나의 투어 금액이 상당히 비쌌다. (예를 들어 볼리비아의 2박 3일 사막 투어는 숙소까지 포함해 원화 약 13만 원이었데 반해 엘칼라파테의 모레노 빙하에서 1시간가량 카약 타는 프로그램은 23만 원이었다.) 아무튼 그 당시에도 꽤 비싼 금액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투어들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두 번째 놀랐던 건, 내가 여기를 왔었다고?? 를 반복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 당시 찍은 사진과 영상이 없었다면 처음 왔다고 여길 만큼 상당 부분의 기억이 소실되어 있었다. 회의적인 시각으로는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억이 없다니… 이토록 금방 잊어버릴 거면 도대체 여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반면, 여행은 그 순간 즐거웠으면 그뿐이지 차곡차곡 기억을 소장해 뒀다가 언제든 꺼내서 짜잔 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매 순간 잊히는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 없다.
아무튼 다시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나긴 하는데 많은 것들이 생경하기도 한 걸 보면, 그 당시 굉장히 임팩트 있는 기억은 아니었나 보다. 앞서 밝혔듯이 아르헨티나에 들어오면서 컨디션이 꽤 회복되었고, 체력적으로 고된 투어들이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강한 인상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힘들면 또 힘들어서 기억에 안 나기도 하지만…?) 참, 여러모로 기억의 메커니즘은 쉽지 않다. 얼마만큼 강렬해야 기억 장치에 얼마의 수명으로 소장되는 건지. 이런 아쉬움이 들 때마다 사진이랑 영상을 더 많이 찍어 둘 걸 하고 후회한다. 글이라도 꼼꼼히 남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늘 기억보다 후회의 유통기한이 길다.
엘 칼라파테에서의 기억이 분명 다른 곳보다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두 번이나 방문했으니 아마도 이제는 더 튼튼하고 짜임 있는 기억으로 남겠지.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 전망대
Parque Nacional Los Glaciares (빙하 국립공원) 내에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다.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배 선착장까지 이어져 걸어 내려올 수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 40-50분 정도 소요된다. 처음 마주한 빙하는 소리로 기억되기도 한다. 계속해서 빙하의 가장자리가 부서져 내린다. (평균 일분에 한두 번 꼴로 떨어지는데, 그렇다면 빙하의 크기가 매일 그만큼씩이나 작아지고 있는 건가?) 빙하가 깨지면서 나는 소리가 우르릉 쾅쾅 꼭 천둥소리 같다. 처음에 소리만 들었을 땐 빙하가 깨지는 소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둘러보니 빙하가 깨지면서 굉음의 천둥소리를, 그리고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깊고 묵직한 소리를 낸다. 한동안 그저 부서져 내리는 빙하를 보고 있게 된다.
페리토 모레노 카약(Perito Moreno kayak experience)
카약을 타고 정말 빙하 코 앞까지 노를 저어 다가간다. 물론 언제 빙하가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거대한 빙하 앞까지는 갈 수 없지만,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것과 강에서 빙하를 올려다보는 건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한 발자국 떨어져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부서져 내린 빙하 조각들이 강물에 둥둥 떠다닌다. 빙하 조각을 건져 올려서 날름 혀를 대본다. (그리고 괜히 둘리를 떠올리는 걸 보면, 찐 K90년대생 인증이다.) 이때의 남은 인상은 바로 옆에서 나는 천둥소리도, 혀에 닿은 빙하의 차가운 감촉도 아니다. 빙하를 보는 것도 카약을 타는 것도 처음인데, 하물며 빙하 조각을 헤치며 유유자적 카약을 타는 경험이야 말로 특별했다. 이토록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빙하 미니 트레킹 (Minitrekking Tour to Moreno Glacier)
그다음 날은 직접 빙하 위에 올랐다. 빙하를 온몸으로 체험해 보려면 눈 밭 위에 눕듯 한 번 누워봐야 되나 싶었는데, 그런 의지를 실행하기도 전에 아이젠을 신은 발이 엉키면서 혼자 나자빠져 엉덩방아를 제대로 찧었다. 그 순간은 창피함이 커서 못 느꼈는데, 며칠이나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정말이지 이토록 온몸으로 빙하를 느끼다니.
가이드가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지만, 안전 교육 시에 빙하 사이의 틈(크래바스)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겁이 많은 나는 행여나 발을 헛디디거나, 속이 비어있는 얼음 위를 밟을 까봐 무서워 앞서 가는 이가 밟은 자리를 고대로 밟으려고 신중을 기하며 걸었다. 얼음 위를 무거운 아이젠을 달고 걷는다는 것도 힘들지만, 잔뜩 긴장해서 몸이 더 무거웠다. 그렇지만 그런 긴장도 불시에 녹여 버리는 풍경이 있다. 빙하 녹은 틈으로 물이 고이는데, 마침 투어 한 날 해가 좋아서 사방 얼음에 반사된 빛이 고인 물 표면에 가 닿으면서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그 틈사이 숨겨진 보물이 내뿜는 빛이 새어나 온 듯, 혹 금방이라도 요정들이 튀어나올 것처럼 푸른빛을 발하며 신비로웠다.
마지막은 이 투어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빙하 얼음 조각을 띄운 위스키 한 잔과 초콜릿이다. 식도를 타고 가슴까지 후끈 뜨거워질 때쯤 달콤한 초콜릿 하나를 삼킨다. 빙하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뿜으며 또 그 맛은 강렬하고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