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0 나는 이때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사랑하게 된 걸지도.
사실 나의 첫 번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특별한 추억을 남겼지만 애정하는 곳은 아니었다. 총 35일의 여정 중 30일 차로 여행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마추픽추나 소금사막, 빙하 같은 거대한 자연경관이 있는 곳이 아니라 다소 가벼운 마음이었다. 여행 끝무렵 쉬어가는 도시쯤으로 여겼다. '남미의 파리'라고 불린다고 했지만, 그 영광은 마치 1930년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낡고 세련되지 않은 도시였다. 그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의 하늘은 맑았고, 투명한 햇살 아래 낡고 거친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면모가 꽤 마음에 들었다. 큰 도시답게 식당, 공원, 랜드마크도 많았고, 땅고의 발상지로 볼 만한 공연도 넘쳐 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3박 4일뿐이었다.
여행한 도시에 대한 감상에 날씨와 체력이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아무리 좋은 풍경도 추위나 더위, 흐린 날씨 앞에서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체력도 마찬가지다. 체력은 곧 마음의 여유이고, 그 여유에 따라 보고 느끼는 바가 현저히 다르다. 그런 면에서 늘 맑은 날씨의 운이 따를 리가 없고, 여행이 길어질수록 컨디션 난조가 이어지니 온전히 아름다움을 체감하기 쉽지 않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그랬다. 바로 전 우수아이에서는 너무 춥다고 불평했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녹아버릴 만큼 뜨거웠다. 해가 나서 좋았지만, 햇살이 너무 뜨겁고 습해서 조금만 걸어도 지쳤다. 극한의 추위였던 볼리비아 소금사막의 밤에서 아타카마의 뜨거운 모래사막으로 넘어왔고, 곧이어 또 파타고니아의 한랭기후를 지나 이번에는 후덥지근한 아열대 습윤 기후다. 몸이 적응할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냉탕과 열탕을 오갔는데, 날씨가 바뀔 때마다 몸이 축축 처졌다. 남은 여행이 일주일도 남지 않아서 바로 다음 주면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에 마음도 버거웠다. 멋진 도시임이 분명했지만, 심신이 지친 탓에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확하게 2년 9개월 후, 나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에 올랐고 6개월을 체류했다. 내가 그곳에 다시 가게 될 줄, 그리고 이렇게 매일 그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글은 첫 번째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에 대해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이후 덧입혀진 감상을 온전히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이른 아침 우수아이아 공항에서 출발해 3시간 30분 비행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내렸다. 이틀 전 미리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한인 민박은 남미에 처음 내렸던 리마 이후로 처음이었다. 숙소가 시내와 다소 거리가 있었고, 또 도미토리나 민박보다는 호텔에 가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숙소를 알아보고 예약하는 일련의 과정마저 힘에 부쳤다. 그래서 동행하던 친구들이 가고 싶어 했던 한인민박에 다행히 일인실도 있다길래 친구들 예약에 슬그머니 얹혔다.
미리 픽업 요청을 해서 숙소 사장님이 공항으로 픽업을 오셨다. 공항 밖으로 나서자마자 뜨겁고 습한 날씨에 당황했다. 이번 도시도 쉽지 않겠단 생각으로 창밖을 내다보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상의를 탈의하고서 러닝 하는 사람들이었다. 번뜩 눈이 뜨인다. 이 도시에 뭔가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남자들도 잘생긴 거 같다(이때였나, 무의식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새겨진 게?). 도로가 넓었고, 지하철도 다닌다(첫 도시였던 리마를 제외하곤 지하철이 다닌 도시는 없었다). 스타벅스가 있다. 확실히 대도시다. 이런 대도시에 온 게 꼭 한 달만이라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것처럼 도시 풍경이 신기해 지하철 입구 사진도 찍었다.
숙소에서 리마에서 같은 숙소에 묵었던 친구를 다시 만나 반가웠다. 그리고 다 같이 택시를 타고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로 이동했다. 웨이팅까지 각오하고 갔는데, 다행히 오픈 시간에 맞춰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스테이크 하우스는 메시의 단골 레스토랑이라고 알려졌는데 확인할 길은 없으나, 사장님이 축구팬임은 확실하다. 온갖 축구 유니폼과 기념품들로 꾸며져 있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이 스테이크 하우스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숟가락으로 스테이크를 커팅하는 퍼포먼스다. 그만큼 스테이크의 육질이 부드럽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다. 나이 지긋한 서버가 숟가락과 포크를 세 번 탁탁탁 부딪치고, 이내 숟가락으로 스테이크를 숭덩숭덩 자른다. 3분의 2쯤 자르고 잘린 단면을 보여주며 'bien(좋지)'하고 읊조린 후, 각각 접시 앞에 놓아준다. 이 레스토랑의 역사, 스테이크 그리고 그들의 연출(?)에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바이브를 뽐냈다.
이후 JTBC 예능인 <트래블러 2> 아르헨티나 편에 안재홍, 강하늘, 옹성우가 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우연히 봤는데, 이 할아버지 서버가 나오는 걸 보니 반가웠다. 당시에 이미 그 세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온 것을 남미 여행자 오픈 채팅방을 통해 실시간으로 알았다. 나의 아르헨티나 여행과 그들의 여행 시기가 정확하게 겹쳤는데, 이동 동선은 반대라 같은 도시에 머무르진 않았다.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내가 지나온 파타고니아 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그때는 내가 여행한 이 나라를 같은 시기에 여행한 그들의 여행기를 보면 특별히 더 친근감이 느껴지고 재밌을 거 같아 기대했는데, 막상 방송이 시작하니 볼 수가 없었다. 이내 채널을 돌렸다. 왜 그랬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내 여행과 괴리가 느껴졌다. 여행할 때도 이미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후폭풍을 심하게 앓았다. 분명 같은 장소에 있는 그들은 행복해 보이고 여행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데, 반면 그러지 못했던 그곳의 나 자신이 떠올라 괴로웠다.
또, 아마 그때부터 아르헨티나를 그리워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보고 있으면 그리운 마음이 더 커질까 봐 채널을 돌려 버린 거다. 여행할 때는 충분히 즐기지 못했으면서, 막상 돌아와서는 그리워하는 미련한 마음이라니. 잊고 있었는데, 당시 인스타그램에 해당 레스토랑을 포스팅하면서 #벌써그리워 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아마도 나는 처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을 좋아하게 됐고, 그리워하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걸 알 수 없는 끌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남은 그리움에 나는 그곳으로 돌아갔고, 그때의 그리움보다 수십 배 더 커진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그리움이 꼭 애타고 슬픈 무게만 가진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너무 힘들어 벗어나고 싶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냈을 때, 그리움이 나를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를 태웠고, 그곳은 내게 안식처가 되었다. 지금은 물론 더 큰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지만 이 무게가 언젠가 다른 용기로 치환되어 행해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