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1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유일하게 가보고 싶었던 곳이 영화 <해피투게더>의 촬영지였던 <Bar Sur 바 수르>라는 땅고 공연 바였다. 개봉한 지 20년도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영화팬들이 찾는 곳이다. 체류하던 일정 중 방문 가능한 날 딱 하루 있었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그 지역 치안이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는데,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한 편의 영화 때문에 남미 여행을 결정했는데 바 수르에 못 간 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웬만한 랜드마크는 3박 4일 동안 야무지게 다닌 거 같다. 특히 이튿날은 만 오천 보 넘게 걸으며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녔고,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도 첫 도시였던 리마 이후로 처음 타봤다. (TMI. 나는 2022년 생일날 바 수르에서 공연을 봤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수공예마켓인 산텔모마켓은 일요일만 오픈한다. (보통 다른 마켓들도 주로 주말에 오픈한다.) 마침 여행 이튿날이 일요일어서 자연스럽게 산텔모마켓을 시작으로 여행동선을 짰다. 여행 막바지라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려고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꼭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정말 기대하면 안 되는 곳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고,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한다. 시장이 끝날 즈음 겨우 팔찌 몇 개를 골랐는데, 하나는 내 손목에 채우고 나머지는 봉지째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TMI. 이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서너 번 더 갔었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살 만한 게 없다. 그리고 이제는 기대만큼 저렴하지도 않다.)
산텔모마켓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라는 타이틀을 가진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갔다. 누군가의 무덤이 볼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화려한 무덤 장식과 동상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또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상기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역대 대통령들과 노벨 수상자를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묻혔는데,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 국민의 성녀라 불렸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의 무덤이 있다. 그녀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찬양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이건 후에 6개월 간 체류하면서 느낀 거다.) 칭송받던 퍼스트레이디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묘인데도 굉장히 단순하고 꾸밈이 없어서 자칫하면 지나치기 쉽다.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만큼 검소하게 묘를 꾸린 거 같다. (TMI. 3년 전에는 무료입장이었는데, 현재는 외국인에게는 입장료를 받는다.)
이번에는 201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선정된 ‘Al Ateno’다. 이곳은 1919년 오페라, 땅고 공연장으로 오픈하였으나, 2000년 오페라 극장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서점으로 재오픈했다. 높은 층고의 무대, 화려한 객석의 문양, 그리고 천장의 벽화를 한눈에 담으면 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 될 수밖에 없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TMI.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인구 대비 서점의 수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다.)
그 후 저녁에 볼 피아졸라 땅고쇼 티켓을 미리 구매하고, 스타벅스에 잠시 들러 간단한 미팅(?)을 했다. (무슨 미팅이었는지는 다음 편에서 공개함…)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피체리아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TMI. 오픈 시간 전에 가도 이미 웨이팅이 있을 만큼 현지에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인만큼 피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내 입맛에는 엄청나게 짰다. (6개월 체류하는 동안에도 입맛에 맞는 피자를 먹어보지 못했다.)
이 날의 마지막 일정은 피아졸라 땅고(스페니쉬 발음으로 땅고가 맞다) 공연이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로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땅고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공연장은 8시부터 입장이 가능한데, 공연 전에 간단하게 땅고 스텝을 배우거나 댄서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저녁 식사도 함께 할 수 있는데, 일행 중에서는 나만 식사가 포함된 티켓을 구매해서 그들과 따로 앉았다. (식사가 포함되지 않는 객석은 오히려 무대와 더 가깝다.)
공연은 열 시가 넘어서 시작한다. 땅고 하면 춤만 춘다고 생각했는데, 춤 없이 듣기만 하는 연주와 노래도 가능하단 걸 처음 알았다. 2층 발코니에서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도 하니 극적인 요소도 더해진다. 땅고 공연은 처음이었는데, 와인을 마신 탓인지 강렬한 반도네온 선율에 따라 가슴이 쿵쾅거린다. 곧 넘어질 듯한 위태로운 스텝을 밟다가 이내 여성 댄서의 허리를 휘감아 낚아채고선 서로의 숨결을 느낀다.
이병률 시인은 그의 저서 <끌림>에서 영화 <여인의 향기>의 명대사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스텝이 엉키면 그게 곧 탱고지요')를 인용하면서 "마음이 엉키면 그게 사랑이죠."라 말했다. 탱고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의미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스텝과 마음이 엉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춤사위였다.
무더웠던 한낮, 강렬한 땅고의 선율, 와인 한 잔으로 풀어진 긴장, 그리고 자정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불빛으로 이어진 하루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서 굉장히 벅찼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긴장이 풀렸던 것 같다. 앞선 도시들에서는 여러 면에서 체력적 한계에 부딪치며 늘 긴장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약을 복용하고 있던 터라 의식적으로 술을 멀리했다. 그런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어쩐지 맥없이 긴장이 풀려버렸고, 와인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야경을 처음 본 탓일 수도 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들이 주는 묘한 설렘을 오랜만에 느낀 거다. 나는 광활한 자연보다도 도시의 낭만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 지구 반대편, 이 도시의 밤공기가 아쉬워서 택시의 창을 내려 밤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잠시 엄마를 떠올렸고, 이 풍경도 언젠가 잊히게 될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아쉬워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3년 6개월 뒤 어느 밤, 친구의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 당시 택시에서 봤던 풍경을 다시 마주했을 때 온몸이 전율했다. 이번에는 택시가 아닌 바이크였으니, 밤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달리고 있어 피식 웃음도 났다. 내가 왜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늘 궁금했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온 첫 순간부터 줄곧 그곳에 다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뜨거운 낮의 열기, 밤의 불빛, 조명 아래 빛나는 화려한 건물들, 그리고 강렬한 땅고의 선율을 가진 이 낭만적인 도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