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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Sep 30. 2023

[남미 여행] #31 나 아르헨티나 다시 올 거야

Day 33-34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 나를 붙든 악마의 목구멍에서


뜨거웠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뒤로 하고 더욱 뜨거운 도시 푸에르토 이구아수에 왔다. 페루 리우(남위 22도)에서 시작한 여행은 반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아 마지막 도시인 푸에르토 이구아수(남위 25도)까지 무사히 닿았다. 내리자마자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가 덮쳤다. 설상가상으로 한 달 넘게 남미 대륙의 거친 돌바닥, 흙바닥 고루 누비며 버텨오던 캐리어 바퀴 하나가 끝내 부서졌다. 한시라도 빨리 짐을 풀고, 이 찜통더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시내까지 들어가는 공항 셔틀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사실 택시를 타고 편하게 이동하고 싶었는데, 동행하는 친구들과 함께라 단독 행동하기가 쉽진 않았다. (공항과 시내까지는 약 30분 정도 소요)



푸에르토 이구아수는 아르헨티나 북동쪽 구석에 위치한 미시오네스(Misiones) 주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며 파라나 강과 이구아수 강을 국경으로 각각 파라과이, 브라질과 맞닿아 있다. 숙소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두 강의 합류 지점으로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Triple Frontier 광장이 나온. 국경선보다 휴전선이 더 익숙한 우리에게 왼쪽 강 건너에는 파라과이가 또 오른쪽 강 건너에는 브라질 땅이 보인다는 게 생경하게 느껴진다. 다른 두 나라를 동시에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라니!


저녁이 되니 한낮의 열기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습하다. 가벼이 입었다고 해도, 워낙 습한 날씨에 몸이 축 쳐진다. 몸이 무거워지니 덩달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다. 상쾌한 바람이 조금만 불어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다 며칠 후 일상이 될 12월의 얼어붙은 출근길을 잠시 상상한 탓일지도. 고된 여행이 빨리 끝났으면 바라면서도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은 모순된 감정이 며칠 째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구아수 폭포행 버스를 타러 갔다. 호스텔(당시에는 꽤 핫한 호스텔이었는데, 현재는 폐업했다.)과 3분 거리에 있던 버스 터미널에서 이구아수 폭포행 버스가 출발한다. 특별히 일찍 나선 이유는 이구아수 폭포의 보트 투어를 미리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원에 입장하자마자 정글보트투어를 예매하러 갔는데 다행히 오전 중에 자리가 있어서 곧바로 보트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까지는 노란 트럭을 타고 이동하며 이구아수 국립공원과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가이드가 2011년 선정된 전 세계 7대 자연경관을 묻는 질문에 Jeju Island라고 무심하게(?) 외쳤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구아수 폭포도 7곳 중 한 곳이다.) 



보트투어를 대비해 우비를 챙겨가기도 하지만, 우비 착용이 무색할 만큼 쫄딱 젖는다. 멀찍이 폭포를 구경하는 데서 나아가 보트가 폭포 가까이 돌진(?) 하기 때문이다. 짐은 챙겨준 비닐 가방에 넣었지만, 사진을 찍겠다며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핸드폰은 물에 잠겨 한동안 물 빼느라 고생했다. 쫄딱 다 젖어도 핸드폰이 한동안 제기능을 못하고 골골 소리를 냈어도 마냥 재밌었다.


보트투어는 한 달 남미 여행동안 했던 모든 투어와 액티비티들을 통틀어 가장 즐거웠다. 일단 날씨가 너무 좋았고, 비현실적인 풍경의 파노라마가 계속되었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수 십 개의 폭포, 사방으로 흩날리는 뽀얀 물보라, 파란 하늘, 언제라도 요정들이 나와 춤을 출 거 같은 푸른 숲. 종교는 없지만 천국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면 분명 이런 풍경일 거다. (나는 이후 명상이 필요할 때, 늘 이구아수 풍경을 떠올린다.)


게다가 보트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이 풍경 속을 유영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출국을 하루 앞둔 이구아수 보트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곳에 다시 올 거라고. 다시 오겠다는 다짐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풍경을 홀로 보고 있자니 늘 마음 한 편에 갖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부모님과 함께 오겠다고 다짐했으나, 또다시 홀로 향했다. 불효자는 웁니다.) 남미 여행은 일평생 한 번이면 충분하다며 고된 여행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했었는데, 여행이 다 끝난 무렵에서야 이구아수 폭포는 내 마음을 붙들었다.




보트투어를 마치면 국립공원 산책로를 따라 이구아수 국립공원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모든 곳이 아름다웠지만, 이구아수 폭포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악마의 목구멍이다. 한 번 빨려 들어가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높고 거대한 물줄기(길이 700미터 폭 150미터)가 떨어진다. 이 폭포를 바라보고 있으면 공포가 느껴질 정도다. 왜 이름이 악마의 목구멍이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제 그만 돌아 나가려다가 말고 이내 발길을 돌려 다시 악마의 목구멍 전망대로 향했다. 방금 본 풍경이 실재였을까. 가슴이 뛰었다. 형용하기 힘든 경이로움을 넘어 공포와 황홀경에 이르렀고, 폭포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주변의 소음이 모두 차단된 데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풍경이라 이성이 마비된 거 같은 혼란스러움도 동시에 몰려왔다. 마침내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등 뒤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굉음이 들렸지만, 돌아보면 폭포는 지워지고 별안간 꿈에서 깨어날 거 같다. 너무나 생생하지만 무섭고 낯선 풍경의 생경한 꿈을 꾼 거 같은 기분이다.



이구아수 폭포도 역시 <해피투게더>에 나왔던 장소다. 영화 초반에 보영이 사 온 스탠드에 그려진 폭포가 마음에 들어 보영과 아휘는 그곳을 여행하기로 한다. 가는 도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보영이 답답하다며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고하고 떠나버린다. 그들은 이구아수에 도착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이후 재회와 이별을 반복한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보영이 스탠드에 그려진 폭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오열한다. 그림 속 연인처럼 두 사람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관계를 망쳐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워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거 같다. 반면, 아휘는 열심히 돈을 모아 홀로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갔다. 아휘 역시 슬픈 표정이지만 오열하던 보영과는 다르게 묘하게 해탈한 표정인 것도 같다. 마침내 폭포에 닿아서야 비로소 보영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보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둘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폭포에 다다랐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잊어갈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니(사실 아주 여러 번 봤다.), 아휘가 서있는 폭포는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브라질 쪽이었다. (이구아수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으로 각각 다른 느낌의 절경을 볼 수 있다.) 아휘가 서 있던 폭포를 보여주고 이후 장면은 악마의 목구멍을 항공샷으로 무려 2분 여 동안 보여준다.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 지난 상념과 회한마저도. 모든 것을 다 쏟아 내고 비우고서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영화 <해피투게더>의 스틸컷


나는 3년 만에 다시 이구아수에 갔다. 다시 이구아수 폭포에 갔을 땐, 악마의 목구멍으로 올라가는 길은 폭우로 트레일이 유실돼 복구 작업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나를 다시 아르헨티나로 오게 붙들었던 풍경이었지만 혹시 어떤 이유로 실망할지도 몰랐다. (처음 느꼈던 감동 이상의 감흥을 느끼는 경험은 흔치 않다.) 처음 느낀 감동 그대로 남겨두는 게 나을 거라고 위로하며, 보트투어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번에는 국경을 넘어 브라질 쪽 이구아수 폭포에 다녀왔다. 브라질에서는 폭포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이구아수의 거대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또 다른 절경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휘가 서있었던 그 폭포 앞에 섰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보였던 악마의 목구멍 폭포의 뒷면이다.)


다시 2019년. 드디어 이구아수 폭포를 끝으로 한 달 여 간의 남미 여행 일정을 마쳤다. 동행하던 한 친구는 이구아수 국립공원에서 나와 미리 챙겨 왔던 짐을 찾아 브라질 국경을 넘어 비행기를 타러 갔다. 우리는 곧 한국에서 만나자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이구아수 공원 앞에서 헤어졌다. 남미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비워내야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나를 속박하는 감정(우울, 불안, 후회, 그리움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 돼서야 그저 이 여행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는지 새삼스럽게 감사할 뿐이었다. 더없이 그 밤이 천천히 저물길 바랄 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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