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고백했다가 까인 썰_2024년 3월 10일_0935_1655
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핸드폰부터 껐다.
0935 – 1025 플러팅 하랬더니 할 줄 몰라서 냅다 고백했다가 까인 썰 푼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몇 번이나 깨고, 몇 번의 꿈을 꾸고도 쉬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제 호감이 있던 분과 함께 운동을 하고 저녁 식사를 했다. 상대가 내게 이성적인 호감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바 아니지만, 어떻게 서든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발만 동동 구르며, 괜스레 버스 막차까지 기다려 준다며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에는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집에 와 아직 살짝 남아있는 술기운에 기대, 어차피 다신 못 보는 사이(운동하다가 알게 된 사이)가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무너질 거 같지 않아서 그대로 고백 문자를 보내버렸다. 차마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나서도 쉽게 답장을 확인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보내온 답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막 말을 편하게 하게 된 사이에 서로에 대해 아는 바도 거의 없거니와, 운동을 제외하고 다른 이야기를 나눈 적도 별로 없어서 상대 입장에서는 내 마음이 당황스러웠을 거다. 이렇게 불쑥 마음이 생겨버린 나도 스스로가 신기하고, 또 이렇게 불쑥 마음을 전달해 버리는 것도 무리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성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최근 5년 동안 누군가에게 이성적 호감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꽤나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전히 처음 해 보는 것이 있다는 게 재밌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해 본 건 거의 처음인 거 같다. '거의'라는 표현이 조금은 애매하긴 하지만)
그는 한 톨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고백에 기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 정석을 보여줬다. 호감은 있지만 이성적 감정은 아니며, 부담스럽진 않으니 앞으로도 종종 같이 운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리고 마음을 고백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첫 문장부터 너무 완곡한 거절이라 살짝 마음이 저릿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마음을 해소하게 됐으니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도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겠다. 사실 마음이 무척 쓰린데 어떻게든 괜찮은 척해야지)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점차 그릇되지 않고 후회되지 않는 선택에 가까워지는 결정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불쑥 고백해 버린 행동이 과연 그런 결정이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분명 그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고백해서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상대도 분명 거절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을 텐데)이 옳았을까. 거절의 결과로 내가 입게 될 내상은 생각해 봤을까. 내게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덤덤하게 털어낼 거절에 대한 면역이 있었을까. 이 모든 대답이 아니오라면 내 고백은 그릇되고 후회되는 행동이 되어 버린 거 아닐까. (마음이 더 쓰라려 온다.)
어쨌든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는 일에 집중해야겠다. 그와 나눈 카톡 대화방을 지우고, 친구목록에서도 그를 삭제했다. 괜히 눈에 밟히면 마음만 불편할 테니. (그렇지만 차마 인스타 팔로잉은 끊지 못하겠다. 이건 너무 쪼잔해 보인다. 그가 운동하는 모습을 영상으로도 나마 계속 보겠지만, 잘 넘겨보도록 하겠다.) 그가 종종 운동하는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다지 쿨한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신경과 에너지를 써야 하는 미묘한 감정을 숨긴 채 관계를 이어갈 여유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 게다가 덕분에 운동에 대한 의지도 대폭 꺾였다. (슬슬 그만둬야지 생각하고 있기도 했으니…) 그저 너무 오랜만에 이런 설레는 감정을 갖게 해 줘서 고맙고도 다행인 마음만 남기고 정리해야겠다.
아, 핸드폰을 켜면 그에게 남길 메시지를 미리 써둔 메모부터 삭제해야겠다.
1025 – 1055 씻으면서 계속 곱씹어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은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지배적.
1055 – 1120 집 정리정돈
1120 – 1140 아침식사 (바나나, 소금빵, 커피)
1140 – 1300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Book Essay 쓰기
1300 – 1320 멍타임 아마도 어제 고백의 쓰라린 여파
1320 – 1600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으려고 했지만 낮잠.
이 책을 최근에 친구가 너무 감명 읽게 읽었다며 추천해 줘서 읽게 됐는데, 첫 문장을 읽으니 단박에 알아차렸다. 나 이 책 이미 읽었네… 고작 2년 반 전에 읽은 책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데, 다시 읽는 게 맞겠지. 이미 책을 엮은 작가의 딸이 쓴 서문만 읽고도 눈물이 터진 참이었다.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차는지." 누구보다 생의 기쁨과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고 애정하고, 소박한 행복에도 벅찬 이 생을 사랑했던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나와 상황을 부정하며 지내왔는지. 이거 고백에 차여서 슬픈 거 괜히 책 읽으면서 눈물 빼는 거 아니지?(사실 맞는 듯)
그렇게 눈물 흘리기도 잠시 책을 읽을 요량이라면서 슬그머니 침실 소파에 누웠다는 거 자체가 이미 곧 잠들겠다는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이 로그아웃하는 시간에 최대한 낮잠을 자지 않기로 했건만 전날 제대로 못 잔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읽지 못하고 스르르 단잠에 빠졌다. 그리고 낮잠이라고 하기엔 꽤 긴 잠을 잤다.
1610 – 1635 청소기 돌리기 및 청소기 세척, 커피메이커 필터 세척
거실에 소파를 놓기보다는 혼자 쓰기 제법 큰 다이닝 테이블을 두었다. 식사도 하고, 컴퓨터도 하고, 유튜브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침실의 소파보다도 대부분의 시간을 테이블에서 보내고 있다. 커피메이커도 마련해서 이젠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나가는 수고도 덜었다. 뭔가 집중해서 해야 할 때 늘 오른손이 닿는 위치에 커피가 있어야 하는데, 드립 커피로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스타벅스 라테가 마시고 싶긴 하다.) 그래서 이제는 어딜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진득하니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자소서 쓰기) 하고 기대를 해봤지만, 역시나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라 아직도 잘 되진 않는다.
게다가 이 와중에 네 살 연하의 운동을 같이 하던 친구에게 섣불리 고백했다가 차이기까지 했으니, 자조하며 더 많은 시간을 마음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뺏길까 염려되기도 한다. 사실 크게 절절했던 마음도 아니고, 오랫동안 깊이 알던 사이도 아니었으며, 가벼운 호감으로 시작했다가 성급함에 불쑥 내던져 버린 마음이라 잘 주워 담아 다독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긴 우울의 터널에 잠식해 있는 나에게 어떤 모습의 내상으로 드러날지 아직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도 아주아주 긍정적인 사고의 회로를 돌려 보자면. 오랜 시간 침잠해 있는 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분을 잘 알진 못하지만 같이 있었던 시간 동안 봐 온 모습과 거절하는 태도로만 판단컨대 좋으신 분 같아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당황스럽긴 해도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기는 긍정적으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제발, 그렇겠지?)
1655 끝.
다시 곱씹어봐도 너무 성급한 고백이었다. 참고로 그는 내 나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