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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 #1 여행의 시작은 부끄러움

DAY 1 LA/여행은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한다.

by Sujin

11월이었지만, 도착할 도시의 날씨를 고려해 가볍게 옷 단장을 했다. 인천 공항은 한 겨울에도 반팔을 입어도 춥지 않고, 한 여름에 패딩을 입어도 덥지 않도록 모든 여행자들을 품는다. 가벼운 옷차림에 마음에 설레고, 멀리 떠나는 자의 왠지 모를 우쭐함까지 더해져 비행을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거웠다. 오후 2시 반에 출발한 비행기는 엘에이에 같은 날 오전 10시에 도착했다. 12시간을 꼬박 날아왔는데 미래에서 온 듯 시간을 거슬러 가 같은 시간을 두 번 살게 했다. 내 삶에 11월 8일 오전 10시가 두 번 있었던 셈이다. 두 번째 11월 8일은 한국에서의 10시와 다르게 무척 뜨거웠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남아메리카까지 가기로 결심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그다지 떠나고 싶은 여행지는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마천루와 화려한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어지러웠다. 이번 여행에서 엘에이를 경유하게 된 것은 순전히 캘리포니아였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는 이름만 떠올려도 오렌지빛 햇살과 핑크빛 석양이 환상의 풍경을 보여줄 것 같았다. 길고 험난할지도 모르는 여행을 시작하기 앞서 따뜻한 응원해줄 것만 같았다. 과감하게 열두 시간 경유를 선택하고, 공항 밖으로 나섰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자주 보던 뉴욕의 모습과는 다른 상대적으로 소박한 모습의 엘에이였지만, 파란 하늘과 가득 메운 빌딩 숲에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하늘로 향하던 시선을 떨구자 보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눈에 띈다. 건물 입구마다 앉아 구걸하는 사람들, 쓰레기를 잔뜩 들고 바지를 추켜 입지 않아 엉덩이가 훤히 보인 채 걸어가는 노숙자들.


애써 그들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시선을 계속 하늘로 돌린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이런 현실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여행에서는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 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나는 내 현실에서 언제나 뒤처지는 존재라고 여겼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늘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해외여행을 다니며, 가끔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부리며 전시하기도 했다. 여행은 어쩌면 그 사치의 한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가난한 이들을 볼 때면 나의 사치가 극명해진다. 그들에게 배고픈 삶의 터전이 나에게는 그저 낯설고 신기하며 즐거운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스스로가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여행의 첫걸음은 부끄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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