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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Mar 22. 2016

자두나무 집에서



수년전 여름이었다. 한산모시짜기 방연옥 선생님을 만나 뵈러 한산에 갔다가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길어지기도 했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 하루 머물기로 했다. 겸사겸사 서천에 경치 좋은 곳들도 둘러보고. 계획에 없던 여행이 된 셈.


당장 숙소가 급하게 됐다. 한산모시관 바로 앞에 여관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어째 딸 같은 아가씨한테 여관을 권하겠냐며 선생의 어린 시절 학교 소사 일을 하셨던 어른댁을 소개해주셨다. 마을버스로 몇 정거장 떨어진 마을에 있는 자두나무 집이다. 선생께서 일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자 거렁거렁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차여차 말씀을 드렸더니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려서 이렇게 저렇게 오면 된다고 소상히. 능숙한 안내. 가끔 농촌체험을 하러 오는 도시 사람들에게 민박을 놓으시는 모양이다.  


30여 분을 기다려 버스를 잡아 타고 마을 어귀에서 내렸다. 그러고 나니 어스름 저녁이다. 종일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배가 미친 듯이 고파왔다. 배를 채울 만한 게 마땅치 않아 구멍가게에 들러 빅파이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요기를 해야지.



근처에서 확인 전화를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골목 어귀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첫마디가 "밥은 먹었시유?" 요기할 꺼리 사 왔다며 봉지를 내보였지만 할머니는 그것 가지곤 안 된다고 혀를 찬다. 라면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 한다고 기여코 가스레인지 불을 올린다. "나는 아들만 넷이거든. 며느리도 넷이고. 우리 며느리들 어디 가서 밥 못 얻어먹는 것 같아서 안 돼." 라면에서 그치질 않았다. 씻는 동안에 참외, 찐 옥수수, 방울토마토를 소복 담은 쟁반과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대령해놓고 기다리신다. 이토록 풍성한 디저트라니. 평소 먹는 양을 훨씬 초과했지만 맛있게 술술 잘 넘어갔다. 참 정다운 맛이라.



할아버지는 게이트볼을 치러 출타하셨다고 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저녁나절 나는 할머니의 말벗이 된다. 한산 여인들은 모두들 모시 일을 했다던데 참말이냐 물었더니 "그람유. 다 했지." 하곤 잠깐 기다려보란다. 방에서 한참 뒤척이시더니 무언가 한 보따리 가지고 나오신다.  시집올 때 해 온 모시옷이라고. 딱히 입을 일 없지만 이 귀한 옷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어야지. 50여 년 할머니의 장롱에 모셔온 모시옷이다. 그래도 잘 모셔놨더니 차려입고 나갈 일이 생기더란다. 모시문화제 때 입고 갔더니 모시로 만든 브로치를 주더라며 연보랏빛 브로치를 옷고름 옆에 달아 놓고는 다시 장롱에 고이 모셔놓았다. 참 곱다. 이럴 때 보면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귀가하신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방에 돌아오니 나 씻는 동안 할머니께서 이부자리까지 봐놓으셨다. 베개 위에 깔린 수건 한 장에 눈이 간다. 서울서 온 아가씨라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이부자리 마땅찮을까 하는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는 이런 것.  


천둥 번개 요란한 밤을 이겨낸 아침이다. 빗소리가 계속 들려오기에 실컷 늦잠을 잤다. 내 여행은 늘 어느 정도 부산한데 이번만큼은 마냥 게으름을 피고 싶었다. 정말로 내 시골 할머니 집과 같은 편안함이 있었거든. 여행 뭐 별건가. 집 떠나서도 이래 두루두루 보고 듣고 먹고 잠 잘 잔 뒤에 무사히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겨우 눈곱 떼고 마루에 나갔더니 할머니의 7첩 반상이 반긴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드시고 출타하셨다. 아침 밥상을 두 번째 차리는데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는 할머니의 아침 인사는 "콩 안 먹지?" 혹시 몰라 콩을 한쪽으로 몰아 아침밥을 지으셨단다. 포실포실 밥 맛 좋다. 어느 일요일 아침, 서천군 한산면 자두나무 집에서의 브런치.   

  

밥 한 공기를 비우니 비가 잦아든다. 마루에 걸터앉아 집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참 말끔하다. 돈푼 들여 꾸민 집이 아니라 손품 들여 살핀 집이라 그렇다. 어젠 어둑해서 잘 몰랐는데 마당이 참 재미나다. 두 분 내외가 소일 삼아 가꾼 화단에 올망졸망 꽃이 곱다. 물들이고 싶으면 봉숭아 좀 뜯어가라고 하신다. 냉큼 좋다고 대답하니 비닐을 가져다주신다.



같이 쪼그려 앉아 봉숭아를 딴다. 이파리도 같이 찧어야 물이 곱게 든다며 고루고루 따주신다. 그러다 발견한 카네이션 하나. 어버이날에 손주 녀석이 와서 달아준 것을 화단 꽃줄기에 달아놓은 거다. 꽃밭 속에 가짜 꽃이 진짜마냥 시침을 뗀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때 나는 다짐했다.


'나, 이토록 귀여운 할머니가 될 테야.'


어차피 정해져 있던 일정이 없었던지라 한참을 미적대었다. 그냥 훌 털고 일어서기엔 서운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겨우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가 조용히 뒤를 밟는다. 몇 번을 뒤돌아봐도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실 줄을 모른다. 들어가시라 몇 번을 손짓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뚱히. 내가 계속 뒤돌아봐서 그러시나 보다. 더는 돌아보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아마도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서 계셨을 거다.


단 하룻밤 여행길 인연인데 불쑥불쑥 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 할머니처럼 고운 사람으로 부지런히 나이 들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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