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일 없이 산다.

네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feat. 장기하와 얼굴들

by 아이리스 J


가수 장기하의 노래 중에

<별일 없이 산다>라는 곡이 있다.

제목만 들으면 평온한 일상 가사 같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참 짓궂고도 서늘하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네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지 못할 거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가사


이 노래는

장기하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나 별일 없이 잘 살아'라는 대답이란다"

라고 하셨단다


많은 사람들은 남들의 안부에

(특히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관심이 많다.

겉으론

‘난 남들에게 관심이 없어’라고 쿨한 척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나랑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특히 내가 힘들 때,

인생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궁금증은 더 짙어진다.

'나만 이렇게 고달픈가?

걔는 요즘 어떠려나?' 하는 마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어?"라고 물을 때,

그 질문 속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진짜 안위가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나보다 너무 앞서가지는 않았으면' 하는

은밀한 바람이 섞여 있기도 한다.

그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나는 별일 없이 살아.’

라는 대답이라고 한다.

이때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직장도 아슬아슬하고 몸도 여기저기 아파"

라고 고충을 털어놓으면,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아준다.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순간

상대방의 무의식은 안도감을 느낀다.

'다들 비슷하게 사는구나.

사는 거 똑같네' 내지는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상황이 낫네'

라는 비겁한 위로를 받는 것이다.

비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상대에게는

달콤한 휴식이 된다.

그 사람이 나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면

뭐 그 또한 괜찮다.


예전에 내가 참 힘들었던 시절,

믿고 의지했던 지인이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고

성품도 너그러워 보이고

만나면 내 얼굴에 그늘이 졌다면

무슨 일 있냐고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지인에게

내 고민을 참 많이도 털어놨었다.

그분은 늘

따뜻한 미소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연락이 뜸해지면 먼저 전화해

"무슨 일 없어?"라고 물어봐 주곤 했다.

참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요즘은 별일 없어요, 잘 지내요"라고 대답하자,

그분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서렸다.

"아니~

그래도 무슨 일 있는지 한번 이야기해 봐~"

라며 집요하게 나의 '불행'을 캐물으려 했다.

마치

내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때 장기하의 노래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 사람들은

내가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길 바라는구나.'

내가 그들보다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순간,

그 따뜻했던 위로는

질투와 외면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옛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린 걸까.

요즘은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씁쓸한 농담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한때는 인간관계에 목매고 살았다.

내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내 편인 줄 알았고,

내 슬픔에 울어주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내가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잘되었을 때

진심으로 손뼉 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사람에 연연하지 않는 법을 배워간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고,

다하면 흐르는 물처럼 보내주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철학이 되었다.

누가 나를 시기하든,

누가 내 불행에서 위안을 찾으려 하든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어쨌든

나는 요즘도 별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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