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대노 Jan 02. 2023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집안 행사가 있어서 주말에 친정엘 다녀왔다.

집에 개가 많아 당일치기로 짧게 다녀오는 게 아니면 어딜 가는 게 쉽지 않다 보니, 친정에서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려면 시어머님께 개들 좀 돌봐주십사 부탁을 드린다. 개들을 이유로 시어머니가 오시면, 내가 미뤄두고 쌓아두고 숨겨둔 집안일을 다 해주시기 때문에 나는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비울 수 있다.

이렇게 엄마가 와서 개들을 봐주면 나한테는 좋은 일만 가득하니 자주 엄마 찬스를 쓰고 싶지만, 그렇다고 쉽게 집을 비울 수는 없다. 아무리 엄마가 간식도 많이 주고 예뻐한다고 해도, 내가 집을 비우면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모두 패턴이 달라져 개들이 긴장하며 나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집을 비우지 않거나 한 끼 식사 정도만 하고 오는 게 대부분인데, 친정 부모님은 딸내미가 친정에 와서 하룻밤도 자고 가지 않는 게 내심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연말이고 하니 집에 와서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내가 좋아하는 회랑 새우랑 게랑 사두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개들 때문에 안된다고 답하기가 너무 죄송했다. 그래서 시어머니 찬스를 사용하고 잘 먹고 잘 놀다 돌아왔는데......




언제나 사람 좋은 우리 시어머니는 약간 엉뚱한 데가 있어 예민한 며느리 속을 뒤집을 때가 있으시다. 며느리가 아끼는 식물의 가지를 실수로 꺾고 눈치 못 채게 숨겨둔다거나 (예민한 며느리는 흘끗 보고도 다 알아채지요), 며느리가 심지 말라는 곳에 도라지를 심는다거나 (개들이 밟고 다니는 곳이라 싹이 나도 다 밟혀서 거긴 안된다고 했잖아요), 며느리가 묻지 말라는 곳에 땅과 나무에 좋다며 음식물 쓰레기를 묻는다거나 (후각이 발달된 개들이 다 파내고 심지어 먹을 수도 있다니까요) 등의 일들을 며느리 눈을 피해 몰래 일을 벌이신다. 그래서 며느리가 잔소리를 시작하면 엄마는 몰래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도망가시는데, 그것도 눈치 빠르고 귀 밝은 며느리에게 들통나서 제대로 도망가시지도 못하면서 아무튼 그러신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가 뿌듯한 얼굴로 말씀하신다.

"내가 마루 눈이랑 얼굴에 난 흰 털을 가위로 싹 다 잘라줬더니 마루가 얼마나 젊어졌는지 좀 봐라!"

앙? 마루 수염을 잘랐다고라고라고요?

마루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홉 살인 마루는 언젠가부터 얼굴에 흰 털이 많아져서 호랑이 할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마루가 늙어서 얼굴이 이제 하얘졌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마루 듣는데 그런 말 하면 마루가 싫어해."라고 답하셨는데, 마루가 흰 눈썹과 수염 때문에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수염은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자르면 안 되는지라 나는 너무 황당할 뿐이었다.


반려견의 수염은 다른 털과 달리 감각 정보를 수용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 수염을 통해 주변 환경을 감지하고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 눈을 보호해주고 어두운 곳에서도 주변 물체의 크기, 속도, 공간을 느끼는 등의 감각기관 역할을 하는지라 특히 노령견인 마루에게는 시력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부분인데, 그걸 잘라버리시다니요!!!!!!!


잠시 멍하게 마루 얼굴을 쳐다보다가 너무나도 뿌듯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상태로 엄마에게 물었다.

"마루가 가만히 있었어?"

"마루가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거 잘라야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가만히 있더라."

ㅋㅋㅋㅋㅋㅋ이게 무슨 말이래요?

처음엔 가위를 눈 쪽으로 가져가니 무서워 피하다가, 할머니가 자기를 예뻐하는 걸 아는 마루는 말려 줄 엄마도 없으니 더는 반항하지 않고 얼굴을 맡긴 것 같다. 아, 순둥이 마루야! 엄마가 거절하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는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얀 호랑이 눈썹과 수염이 무성했던 마루는 그 털을 다 잘리고 너무나도 순둥순둥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그 얼굴을 자꾸 내 품에 파묻는다. 나는 그런 마루를 다독이며 위로해 준다.

"마루야, 엄마가 어두운 곳에서도 잘 데리고 다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마루야, 자꾸 보니까 젊어 보이는 것도 같아~^^"



엄마를 보자마자 하소연하는 마루. 엄마, 할머니가 내 눈썹이랑 수염을.........
눈썹과 수염을 자르기 전과 후의 마루.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엔 칸트가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