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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노 Apr 21. 2022

남편은 꼼꼼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드디어 그림 하나를 완성했다.

얼마만인가. 지난 작품 사인을 확인해보니 2021.10월로 되어 있다. 6개월 만에 완성한 대작(?)이다.

성인 취미 미술반에서 그림 하나를 6개월씩 그리는 수강생이 남편 말고 또 있을까?

그 사이에 나는 3개를 완성하고, 유화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해서 4번, 5번 작품을 같이 하고 있으니, 남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꼼꼼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왔는지 그 시간이 말해준다.


남편이 그림 하나를 너무 오래 그리다 보니 처음엔 미술 선생님도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초창기엔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를 수십 번 외치셨지만, 이제는 남편의 그런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시는 중인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 그림을 그려보면서 실력이 향상되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A님은 그림 하나를 그리는 과정 중에서도 계속 성장하는 게 보여요. 굳이 빠르게 그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안 하시진 않는다.

선생님의 멈춤 신호 요청을 3주 정도 가볍게 넘기고 나면 남편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고 말한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이제 그만 끝낼까?"

제발, 제발, 제발 쫌!!!! 너 그거 그리는 거 보는 것도 지겹다고!!!!!


퇴근 후 미술학원으로 오는 남편은 우리보다 그림 그릴 시간이 적다. 한 주에 2시간 정도 그리는 나에 비해 길어야 1시간 반 정도 그리는 그림이니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다.




남편은 옷 하나를 살 때도 단추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고 원하는 옷을 사야 하기 때문에 선물한답시고 내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본인의 디테일을 놓쳐 원치 않는 옷을 사주고는 왜 안 입냐고 강요할까 봐라는 걸 잘 알아서, 나도 남편 옷은 사지 않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인텔의 앤디 그로브.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에 깐깐했고, 빌 게이츠는 코드에, 앤디 그로브는 회사 일 전반에 걸쳐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디테일의 힘을 발휘해 성공한 거라면 남편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 이제 난 성공할 남편을 기다리기면 하면 되는 건가?


(생뚱맞게 남편 그림 얘기하다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앤디 그로브라니......내가 아는 꼼꼼함의 대가들과 남편을 이렇게라도 같은 선상에 한번 놔주고 싶은 콩깍지 쓴 아내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주길 바란다.)




남편이 꼼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건, 남편이 일상생활에서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대충 해", "그럴 수도 있지", "힘들게 하지 마" 등등 무언가를 할 때 힘들 게까지는 하지 말고 설렁설렁할 수 있는 만큼만, 좋을 때까지만 하라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원주택에 살게 되면서, 그림이나 사격, 목공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게 되면서 남편의 꼼꼼함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매사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달고 사는 남편은 오롯이 본인이 책임지는 부분에만 꼼꼼할 뿐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기에, 이 남자의 유연함 속에 그 꼼꼼함이 묻혀 있었나 보다.

본인이 무척 꼼꼼한 사람임에도 "대충 해", "그럴 수도 있지", "힘들게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알고 나니,  남편의 꼼꼼함이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이 더 좋아진다.


남편, 설거지도 꼼꼼하게! 알았지?




남편이 6개월 만에 완성한 그림, 사실 그림 사이즈도 크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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