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지난 작품 사인을 확인해보니 2021.10월로 되어 있다. 6개월 만에 완성한 대작(?)이다.
성인 취미 미술반에서 그림 하나를 6개월씩 그리는 수강생이 남편 말고 또 있을까?
그 사이에 나는 3개를 완성하고, 유화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해서 4번, 5번 작품을 같이 하고 있으니, 남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꼼꼼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왔는지 그 시간이 말해준다.
남편이 그림 하나를 너무 오래 그리다 보니 처음엔 미술 선생님도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초창기엔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를 수십 번 외치셨지만, 이제는 남편의 그런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시는 중인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 그림을 그려보면서 실력이 향상되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A님은 그림 하나를 그리는 과정 중에서도 계속 성장하는 게 보여요. 굳이 빠르게 그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안 하시진 않는다.
선생님의 멈춤 신호 요청을 3주 정도 가볍게 넘기고 나면 남편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고 말한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이제 그만 끝낼까?"
제발, 제발, 제발 쫌!!!! 너 그거 그리는 거 보는 것도 지겹다고!!!!!
퇴근 후 미술학원으로 오는 남편은 우리보다 그림 그릴 시간이 적다. 한 주에 2시간 정도 그리는 나에 비해 길어야 1시간 반 정도 그리는 그림이니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다.
남편은 옷 하나를 살 때도 단추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고 원하는 옷을 사야 하기 때문에 선물한답시고 내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본인의 디테일을 놓쳐 원치 않는 옷을 사주고는 왜 안 입냐고 강요할까 봐라는 걸 잘 알아서, 나도 남편 옷은 사지 않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인텔의 앤디 그로브.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에 깐깐했고, 빌 게이츠는 코드에, 앤디 그로브는 회사 일 전반에 걸쳐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디테일의 힘을 발휘해 성공한 거라면 남편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 이제 난 성공할 남편을 기다리기면 하면 되는 건가?
(생뚱맞게 남편 그림 얘기하다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앤디 그로브라니......내가 아는 꼼꼼함의 대가들과 남편을 이렇게라도 같은 선상에 한번 놔주고 싶은 콩깍지 쓴 아내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주길 바란다.)
남편이 꼼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건, 남편이 일상생활에서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대충 해", "그럴 수도 있지", "힘들게 하지 마" 등등 무언가를 할 때 힘들 게까지는 하지 말고 설렁설렁할 수 있는 만큼만, 좋을 때까지만 하라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원주택에 살게 되면서, 그림이나 사격, 목공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게 되면서 남편의 꼼꼼함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매사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달고 사는 남편은 오롯이 본인이 책임지는 부분에만 꼼꼼할 뿐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기에, 이 남자의 유연함 속에 그 꼼꼼함이 묻혀 있었나 보다.
본인이 무척 꼼꼼한 사람임에도 "대충 해", "그럴 수도 있지", "힘들게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