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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노 Apr 20. 2022

관장님의 말투에 홀려 검도관에 등록했다.

"엄마, 나 검도 배워보고 싶어!"

"검도? 왜?"

"나랑 친한 A 알지? A가 검도를 6년이나 배웠다는데, 오랫동안 배운 운동이 있다는 게 좋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배워보고 싶어 졌어."


검도라.. 취미가 백만 스물다섯 개가 넘는 내가 검도를 지나쳤을 리가 있겠는가. 물론 해봤다! 시도만.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 배우의 검도 씬에 반해 '언젠가 운동을 한다면 검도를 배워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그 검도는 18년쯤 전 남편과 함께 시도해보았던 운동 중 하나였다.

지금은 3개월에서 6개월 사이면 호구 쓰고 머리를 외치며 대결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호구 한번 쓰려면 꽤 오랜 시간 기본자세만 주야장천 했어야 했다

발바닥으로 쓸면서 다녀야 하니 발바닥은 얼마나 아픈지.

이 운동을 계속하려면 발바닥 쓸리고 아픈 것부터 해결해야겠다 싶어 해외직구로 '검도 족대 신발'을 구매했는데, 이게 도대체 배송이 안 되는 거다.

맨날 같은 기본자세만 반복하는 운동이 재미도 없는데 발바닥은 아파 죽겠지, 신발 배송은 감감무소식이지... 검도관을 가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던 그때 다행스럽게(?), 박사 논문을 준비하느라 시간 내는 것 마저 어렵게 되면서 흐지부지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죽도와 도복만을 남기고 나의 검도 인생은 끝나는 듯했더니만, 나의 딸답게 사교육을 너무나 좋아라 하는 내 아이가 검도를 배우겠다고 하니... 검도관, 알아봐야지! 암요! 알아보고 말굽쇼!




내가 언제 또 검도를 하겠냐 싶어 남편과 나의 도복을 버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왜 이제 와서 검도가 하고 싶은 거야! 좀 진작 하고 싶어 하지!'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질풍노도의 사춘기 아이 뇌의 BDNF* 수치를 높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검도관을 알아보았다.

사춘기 때 하는 운동은 뇌구조와 기능을 강화해 행동 조절과 감정 조절 기능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 건강한 자아개념 형성은 물론 자존감도 높여준다는데, 이렇게 먼저 운동을 하겠다고 하는 아이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Brain Derived Neurotrophic Factor,  뇌에서 유래되는 신경세포에 영양을 공급하는 물질로, 질풍노도 시기를 격하게 보낼수록 수치가 낮으며, 고강도의 신체 운동을 통해 분비된다.)


몇 군데 검도관을 알아보는 중, 지금 다니고 있는 검도관 관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여자 관장님이셨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이다 보니 아무래도 여자 관장님이 조금 더 세심하게 배려해주실 것만 같다는 편견을 가지고 남편, 아이를 대동하여 검도관을 방문했다. 관장님이 나의 검도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어 준 이영애 배우 같은 '산소 같은 여자' 이길 바라며.......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 귀엽고 작은 얼굴, 부드럽지만 간결한 말투.

대화를 진행할수록 묘하게 빠져드는 관장님의 말투에 이끌려 입관을 마치고 나자, '이렇게 운동을 하게 되는구나, 나의 주말이 사라지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딸아이의 일정 상 규칙적으로 오가며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주말밖에 없는데, 주말에 운동을 하게 되면 오가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 씻는 시간 등을 포함하면 주말의 반나절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었기에, 함께 보내는 주말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남편과 나는 이 운동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말이 반나절이지, 주말 반나절 사라지고 나면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느끼면서도, 시간 소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집 안에서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우리도 운동이 필요하긴 했는데, 주말 이틀이라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하자."

입관을 마치고 나오면서 남편이 위로해주었지만, 이런 말로 위로가 될 게 아니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검도관을 간 첫날.

관장님의 환영을 받으며 준비운동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다리가 퇴화될 것이라는 농담을 할 만큼 운동과 담쌓고 지내던 우리는 한 동작 한 동작 따라 하는 것이 죽을 맛이었다.

준비운동만 30분을 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검도 기본자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렇게 힘든데도, 관장님의 "할 수 있어요!"라는 한 마디에 이끌려 우리 모두 그 동작을 끝까지 따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관장님의 부드러운 말투에는 힘이 있었다.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아! 그러셨어요?", "처음이라 그러실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관장님으로부터 부정적이거나 나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의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 자세가 좀 이상하죠? 예전에 테니스 배울 때도 그렇고, 골프도 그렇고 제가 처음 자세 배울 때 많이 헤매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처음이니까 안 쓰는 근육을 쓰고, 안 쓰던 자세를 잡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제가 개개인에 맞춰 계속 설명드릴 거니까요. 제가 설명을 잘한다는 게 아니라, 알게 될 때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반복해서 설명해주는 게 가르치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계속 옆에서 말씀드릴 테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심지어 내 자세가 너무 엉성한 게 답답한 나머지, 쉬는 시간에 남편이 자세를 고쳐주는 상황에서도 관장님은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남편분이 설명을 정말 잘해주시네요. 저렇게 잘 설명해주시니까 금방 이해되시죠?"라며 다시 내 자세를 잡아 주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보통의 전문가들은 본인이 가르치는 곳에서 누가 저렇게 설명을 하고 있으면 주제넘는다고 여기는 게 대부분인데, 남편이 무안하지 않게 오히려 남편을 칭찬하는 관장님이 새삼 더 멋지게 느껴졌다.

"처음인데, 너무 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진도를 조금 빠르게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아닌 걸 알면서도 믿게 되는 관장님 말투의 힘! 괜히 기분 좋아져서는 운동을 하면서도 운동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백만 번도 더하게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관장님의 말투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아니, 그건...."부터 시작하는 내 말투를  반성하게 된다.

"관장님 말투 너무 좋지? 여기 오기로 한 거 너무 잘한 거 같아. 나도 관장님처럼 말해야겠어. 남편님, 집에 가셔서 바로 설거지하실 수 있어요. 운동하고 바로 가서 설거지하는 거 처음이라 어려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제가 옆에서 계속 말씀드릴 거니까요. 하실 수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하지 마! 네가 하는 건 묘하게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비록 근육통으로 사흘간은 그냥 누워만 있어야 하지만, 나의 주말과 바꿀 가치가 충분히 있는 운동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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