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복은 누가 샀지?

기록의 중요성_ 오롯이 나만 기억하는 그 일

by 박대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똘똘한 독자인 동생에게 얘기해주며 동화 소재로 어떤지 물었다.

“언니는 이런 게 기억이 나? 나는 나의 어릴 적 기억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시작된 동생의 어린 시절 기억 찾아주기!



딸만 셋이었던 우리 집 막내, 내 동생은 어릴 때 아들이라는 오진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듣고 자랐고, 뚱뚱하지 않은 통통한 몸 때문에 동네 아줌마들로부터 “언니들은 다 날씬하고 예쁜데…….”라는 말줄임표로 종종 상처받으며 살았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동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매년 여름이면 바닷가로 피서를 갔다. 그 당시에는 차도 없어서 아빠가 텐트를 이고 지고, 전쟁 통에 피난 가는 거 마냥 줄줄이 애들 손을 잡고, 고속버스를 타고 어렵게 다닌 피서지만, 아빠 용돈을 1년 동안 모아서 가는 피서는 한 해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우리가 자는 동안 엄마 아빠는 새벽 일찍 포구에 가서 회도 떠오고, 우리가 좋아하는 마른오징어나 쥐포를 사 오기도 했다. 그때는 우리가 너무 일찍 깼든지, 엄마 아빠가 늦게 도착했든지, 일어나 보니 엄마 아빠가 없었다.

동생은 울기 시작했고, 울고 울고 또 울다 언니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언니, 우리 집에 갈 돈 있어?”

어렸던 언니는 그래도 역시 맏딸답게, 엄마 아빠 곧 돌아오실 거라고, 그리고 안 오시더라도 언니가 집에 가는 버스도 알고, 집에 갈 차비도 있다고 동생을 안심시켰다.



막내라 신경을 덜 쓴 건지도 모르겠다. 받아쓰기에서 1학년 내내 80점 한 번이 최하 점수였던 나와 달리, 내 동생은 자기 이름도 겨우 쓰고 입학했으니 성적이 좋았을 리 없고, 동네 아줌마들이 이걸 놓칠 리가 없다. “언니들은 공부도 잘하는데…….”

말줄임표가 주는 상처는 의외로 깊었고, 자랄수록 동생에겐 트라우마가 되었던 지,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자기 전 문단속을 몇 번씩이고 확인하는가 하면 엄마에게 우리 집 재산이 얼마인지를 매일같이 확인하였다. 머리카락을 꼬는 버릇이 생겼고, 자라는 내내 위축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농담으로 치부되었던 저런 말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평생을 가져갈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가학적 농담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아니, '날씬하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잘난 언니라는 타이틀을 조금은 뿌듯하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이 조금 늦게 틔는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4학년 때부터는 100점을 맞기 시작하면서, 공부로 비교당하는 일은 줄어들었는데, 오히려 그게 원인이었을까? 동생은 시험 전이면 앞 머리카락을 뱅뱅 꼬며, 안절부절못한 채로 공부를 했다. 피아노 학원을 4년을 다녔는데도, 음악 시험 전이면 유독 더 긴장해서 공부도 못한 채 울기만 했다. 나도 시험기간인데, 엄마는 그렇게 우는 동생에게 음악 시험공부를 도와주라 했었다.

지금 엄마에게는 초등 고학년 때부터는 올백만 맞던, 공부 제일 잘했던 딸로 기억되는 내 동생.



마론 인형을 좋아하여 나중에 부자 되면 마론 인형 집을 사달라고 했던 내 동생. 이제 40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부자가 아니라서 마론 인형 집을 못 사주냐고 엄마에게 농담하면 엄마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하신다. 어린 시절 내 기억의 동생은 종이 인형이든 마론 인형이든, 항상 인형 놀이를 했고, 그 옆엔 언니가 있었다. 난 이들과는 잘 어울려 놀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번 끼워주기라도 하면 히피족처럼 돌아다니면서 사는 설정을 해서 결이 다른 인간으로 여긴 듯하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는 동생의 어린 시절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던 중, 문득 한 사건이 떠올랐다. 사건이라 할 수도 없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만 기억하는 일.



4학년 때부터 다달이 용돈을 받았다. 4학년 때는 5천 원, 5학년 때는 6천 원, 6학년 때는 7천 원이었는데, 아빠가 아침에 출근하실 때 뽀뽀하면서 받은 100원이나 심부름하고 남은 잔돈을 모아 9천 원을 만들면 만원으로 바꿔주셨다. 책도 아빠가 다 사주시고, 간식은 엄마가 대부분 만들어 먹이셨으니 따로 용돈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는데, 아마도 저축하는 습관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애는 셋이나 되는 데다가, 엄마는 유독 맏딸을 아꼈고, 아빠를 많이 닮아 아빠가 나를 조금 더 챙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엄마한테 조금 더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동생이 중학교 입학하던 때 일이다. 외벌이 아빠에 딸 셋을 키우는 엄마에게는 생활비가 항상 빠듯했을 테니, 내가 엄마한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 잘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이 중학교 입학하던 해의 1월 말, 용돈을 받고 저축액을 확인하던 그날, 내가 말했다.


“엄마, **이 중학교 입학할 때, 교복 내가 해줄게.”

당연히 그 순간 엄마는 좋아하셨고, 기특해하셨다. 그 기특함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겠지만.

아니,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엄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게 문제지만.



언젠가 엄마랑 둘이 앉아서 이 얘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무슨 **이 교복을 해줘!”

그랬다. 나는 잘 보이고 싶어서 내 돈 아까운 거 참고, 동생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서 동생 교복을 내 돈으로 맞춰준다 한 건데, 엄마는 그 돈은 아꼈겠지만, 엄마 위해서 쓴 돈은 아니니 기억에 남아 있지 않게 된 거다.


그럼, 받은 동생은 기억해야 하지 않느냐고? 어차피 받아야 하는 교복 누가 해주더라도 해주는 건데, 내 동생에게 그게 무슨 중요한 사건이었겠는가?

나한테는 큰돈으로 내가 허세 부린 거라 기억에서 밀어버릴 수 없는 일인 것이고…….


조금은 억울해진 기분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나 기억나!”

“뭐가?”

“13만 원이었어! 네 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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