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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14. 2024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소명을 위해

갭먼스를 건강하게 보내는 8가지 방법

돌봄의 시작


2024년 봄의 끝자락이 느껴지던 어느 날, 3년을 몸 담았던 회사에게 작별을 고했다.


젊은 팀장, 잘 나가는 신사업부. 그대로만 버티면 금전과 명예가 보장된 길이었다. 산업도, 회사도, 팀도 모두 성장하고 있었기에 외적으로는 무한히 커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내면은 점점 공허하고 소진되어 갔다. 안과 밖의 괴리가 커질수록 그 길이 아니라는 외침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인터스텔라마냥 나를 지키려는 소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요즘은 이직이 자유롭고 프리랜서나 N잡러가 많아진 시대다. 퇴사 자체가 그리 특별하지 않은 키워드다. 하지만 흔하다는 것이 결코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또 동시에 누구나 하기 어려운 게 퇴사다. 많은 이들이 퇴사를 이별에 비유하지 않나. '좋게 헤어졌다'는 말이 무의미한 것처럼, 퇴사라는 헤어짐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내고 당사자는 일정 수준의 회복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회사 계정 로그인이 튕긴 화면. 기분이 살짝 묘했다.


그렇게 퇴사 과정을 거친 뒤 5개월째 온전히 스스로를 바라보며 내면을 돌보고 있다. 철저한 계획보다는 흘러가는 휴식의 시간, 누군가는 '경력 공백기'로 혹은 '백수 시기'로 부를지 모르는 이 자유의 기간을 '갭먼스'라 칭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고, 치유가 한 걸음씩 이루어졌다.




다시 부딪힌 물음


갭먼스(gap months) 개념을 먼저 짚고 가야겠다. 외국, 특히 서구권 나라의 고등학생들이 졸업 후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1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는 갭이어(gap year)에서 파생된 말로, 퇴사와 이직이 잦아진 최근 들어 조금씩 쓰이고 있다. 1년까지는 아니어도 몇 달 동안 갭(gap)을 두어, 바로 직장을 옮기지 않고 쉬거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등 회사 밖에서 다채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시각으로 보면 경력에 공백이 생겨 부정적으로 여겨질 법하지만, 무작정 달리다가 번아웃을 경험하고 퇴사한 이들에게 갭먼스는 경력 이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원래 단어인 갭이어는 뭔가 1년 동안 남다른 계획을 세워서 이력서 칸 채우듯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갭먼스라고 하면 조금 그러한 부담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다(그리고 생각보다 1년이나 쉬는 건 어렵다). 그런 차원에서 '갭먼스'라는 네이밍은 이 기약 없는 공백기에 붙이기 꽤 적절했다.


줄어든 부담만큼, 퇴사 후 그다지 대단한 걸 하지는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어떻게 쉴 계획이냐고 물었지만 거창한 계획을 세울 힘조차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들 가슴 한 켠에 사직서를 품고 '퇴사 후 세계여행' 같은 콘텐츠로 대리만족을 해서 그런지 신박하고 재미난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내게 가장 큰 목표는 일상을 회복하고 자기 관리하는 감각을 깨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 스스로를 다시 찾고 재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동안 모든 의식과 에너지가 외부로 쏠리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와있었기 때문이다.


낯익은 작업이었다. 평생의 숙제가 '나를 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뚜렷한 개성이나 내세울 만한 특징이 없는 사람으로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언제나 가장 궁금하면서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돌고 돌아 결국 그 물음에 다시 부딪힌 것이다. 직전 회사에 처음 들어온 3년 전에도, 대학원에 입학한 7년 전에도, 한창 미래를 꿈꾸던 10년 전 대학 시절에도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해 또 한 번 더 스스로를 직면해야 했다.


Every person’s true calling was only to arrive at himself.
인간에게 진정한 소명은 하나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돌봄의 길


스스로를 향한 고민은 도루마무처럼 반복되고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렵지만, 학습자가 나선형으로 성장한다는 교육학 이론이 여기서 적용되었다. 이번에는 적어도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떻게 가야 할지 조금 더 선명해진 것이다. 아직 명확한 길은 모르지만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을 골라낸 기분이랄까. 지난 4개월동안 스스로에게 행한 돌봄은 크게 8가지로 정리되었고, 키워드는 아래와 같다.

 

(1) 루틴 (2) 운동 (3) 명상 (4) 관계 (5) 기록 (6) 여행 (7) 생산 (8) 행동


평범해보이지만 이 모든 돌봄의 과정에서 나 자신을 이루는 조각이 하나둘 채워짐을 몸소 느꼈다. 매력적인 비법은 아닐지언정, 갭먼스를 건강하게 보내는 방법 정도로는 충분히 소개할 수 있겠다.


8개 키워드는 아주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본을 챙기지 못해서 때로는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발목 정도에서 넘실거리는 얕은 물결을 거센 파도로 만들기도 한다. 흔들리기 쉬운 시기에, 그것이 꼭 갭먼스가 아니더라도, 작은 실천을 통해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갭먼스를 보내면서 짧게 떠오르는 생각은 스레드(Threads)에, 일상적인 일기나 생각은 노션(Notion)에 정리해 두었다. 꼬박꼬박 쌓은 기록을 차분히 돌아보며, 위 8개 키워드를 조금 긴 브런치의 호흡으로 풀어보려 한다. 일차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반성과 회고다. 아직 진행 중인 갭먼스,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그 전에 감각을 유지하며 갈무리하고 싶다. 그래야 다음 챕터도 더 홀가분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써 내려갈 테니까.


더 나아가 다른 이들과 연결되길 원한다. 나와 비슷하게 휴식의 시간을 보내는 퇴사러들에게 응원과 연대의 마음 보내기. 회사명, 직무, 직급 없이 지내다 보면 때때로 불안과 조급이 찾아온다. 이를 애써 피하지 않고 성숙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함께 근육을 키워가고 싶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며 더 현명하고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그렇게 모두 인간으로서 가진 진정한 소명(true calling)에 가까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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